“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료, 초야우생(들판에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 이렇다 어떠하료. 하물며 천석고황(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질병처럼 깊음)을 고쳐 무엇하료."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인 1일 오전 11시. 500년 서원 역사상 최초로 여성이 초헌관을 맡아 술잔을 올린 경북 안동 도산서원에 퇴계 이황 선생이 지은 도산십이곡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이날 향사에는 초헌관에 이배용(전 이화여대 총장) 한국의서원통합보존관리단 이사장이, 아헌관은 이동선 전 서울여대 교수, 종헌관 허권수 경상대 명예교수, 분헌관 이정화 동양대 교수 등이 술잔을 올렸다.
향사 시작 30분 전인 10시30분부터 전교당에서 아헌관 종헌관은 관대 관모 관복 등으로 격식을 갖췄다. 여성 헌관인 초헌관과 분헌관은 별도의 관복이 없었다. 향사 준비가 끝나자 유사들은 10시50분쯤 도산십이곡을 함께 부르며 본격적인 향사의 시작을 알렸다.
집사(집 일을 보는 사람)와 알자(손님을 주인에게 인도하는 사람)의 안내로 이 이사장이 먼저 상덕사(사당)로 들어왔다. 이어 아헌관, 종헌관과 분헌관은 한 조를 이뤄 사당으로 들어왔다. 사당으로 들어온 헌관들 가운데 초헌관이 가장 먼저 손을 헹구고 신위 앞으로 이동, ‘퇴도이선생’이라고 쓰인 신위 앞에 꿇어 앉아 첫 술잔을 올렸다. 이어 동문으로 나와 원래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 뒤를 이어 아헌관이 두 번째 술잔을 올린 뒤 내려왔고 종헌관과 분헌관은 함께 올라가 종헌관은 퇴계 선생께 세 번째 술잔을, 분헌관은 월천 선생께 술잔을 올리고 돌아왔다.
제관들은 곧 이어 전교당에서 음복례(술이나 제물을 먹는 의식)를 진행했다. 헌관들은 각상, 유사들은 2인 1상에 돼지수육과 약밥이 올라왔다. 헌관들이 ‘오늘을 기억하고 미래를 다짐하자는 의미’를 담아 3잔씩 음복을 한 뒤 공식 향사가 모두 마무리됐다.
이배용 이사장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진지했고, 질서정연하게 잘 진행돼 기쁘게 생각한다”며 “퇴계 선생께도 감사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이날 향사에는 취재진과 관광객 등 50여명이 몰려 높은 관심을 반영했다.
서원에서 여성이 처음으로 술잔을 올린 만큼 복식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이 쏠렸다. 이 이사장은 새벽 4시부터 쪽진머리에 비녀를 꽂고 자주색 상의에 파란색 치마를 착용했다. 조선시대 부녀자들의 예복인 ‘당의’였다. 여성이 초헌관을 맡은 것은 전례에 없던 일이라 가장 보편적인 화장을 했다.
전날인 30일에는 헌관들과 유사들이 모여 향사 예행연습과 부대행사를 치렀다. 향사에 초대된 헌관들은 전교당 내 한존재에서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이 밖에 알묘(종묘나 사당에 배알하는 것)와 분정(역할을 분담하는 것), 척기례(제기를 씻는 것), 봉정례(술을 봉하는 것) 등이 차례로 진행됐고, 야화(담소를 나누는 것)를 끝으로 오후 9시쯤 마무리 됐다.
이 이사장의 특강도 열렸다. 이 이사장은 "도산서원 등 한국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의미를 되새기고 새로운 미래를 함께 그리는 시간이 될 것"이라며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우리 사회가 방황하고 있지만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가치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한국 서원이 지난해 세계유산 등재된 것은 천운이라고도 볼 수 있다”며 “지난 10년간 등재를 위해 지역 유림과 문화재청, 지자체 등이 합심했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서원을 통해 최근 사라져가는 있는 우리 시대 진정한 가치를 되찾을 수 있다는 의견도 내비쳤다. 그는 “서원이 세계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력과 심신의 안정을 유지토록 하는지 정작 우리 국민들은 잘 알지 못한다”며 “서원은 전공과 직업을 불문하고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인성 없는 지성과 지식은 영리한 인간을 만들 수 있지만 가슴 따뜻한 인간을 만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서원에서 공동체 정신을 찾고, 언택트(비대면) 시대에도 자연을 가슴에 담을 수 있다면 인간다움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서원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도 촉구했다. 그는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지만 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며 “퇴계 선생의 뜻을 기리는 것은 문서로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실천하려는 마음가짐이 바탕이 돼야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세계유산을 가지면 국가의 격이 달라지고, 국민들의 시선도 달라진다”며 “우리 것에 대한 문화적 가치를 알고, 아름다운 유산을 함께 할 때 더욱 풍성한 문화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권력을 자랑하면 의를 얘기할 것이오’라는 퇴계 선생의 말씀처럼 서원을 교육문화의 본산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제향 인물들의 사상을 현대적인 교육으로 정리해 많은 학생들이 세계문화유산의 현장에서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지고, 문화 정신운동을 통해 신르세네상스 시대를 열어 자긍심을 가질 수 있기 바란다”고 특강을 마무리했다.
한편 지난달 17일에는 김병일 도산서원장과 유사들이 모여 술잔을 올릴 헌관들을 임명하고 망기(임명장)를 작성하는 ‘차제’가 열렸다. 이번 향사는 지난 3월 춘향례를 통해 치러질 예정이었지만 대구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신종 코로나가 급속히 확산하면서 이번 추향례로 치러졌다.
초헌관을 맡은 이배용 이사장은 지난해 7월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영주 소수서원, 경주 옥산서원, 대구 달성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정읍 무성서원, 장성 필암서원, 논산 돈암서원 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공로를 인정받았다. 도산서원 운영위원회는 지난 1월 이 이사장의 초헌관 임명에 대해 만장일치로 선정했다.
퇴계 이황 선생은 1561~1570년 도산서당에서 직접 강학을 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사후 4년 뒤인 1574년 제자들이 퇴계의 뜻을 기리기 위해 도산서원을 새로 짓기 시작해 1575년 완공했다. 같은 해 선조로부터 도산서원 현판을 사액받고, 조선 성리학의 중심으로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도산서원 현판은 조선 최고의 명필로 불리는 한석봉이 썼다. 도산서원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상덕사(보물 제211호)에는 퇴계와 제자 월천 조목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