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낙태죄인가?

입력
2020.09.29 18:00
22면
헌법불합치 받고 시한 임박한 낙태죄
폐지 대신 수정 쪽으로 방향선회 조짐
더이상 젊은 여성들을 구속하지 않길



“프랑스에선 매년 백만 명의 여성들이 낙태를 하고 있다. 정상적인 의료적 처치라면 단순한 절차에 불과하지만, 비밀리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낙태 시술은 위험하다. 사회는 이런 수백만의 여성들에 대해 침묵해 왔다. 나 역시 그들 중 한 명이다. 나는 낙태를 한 적이 있다. 우리에게 피임할 자유가 있는 것처럼, 낙태할 자유를 요구한다.”

1971년 4월 5일 프랑스 잡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Le Nouvel Observateur)'에 실린 선언문이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가 쓰고 343명의 여성들이 서명했다. 그들은 자신의 얼굴 사진을 싣고 자신 역시 낙태를 했노라고 고백했다. 낙태가 불법화되어 처벌받던 프랑스 사회에서 그들은 "나도 낙태라는 불법 행위를 했다. 나를 감옥에 가두라"고 외쳤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 프랑수아즈 사강, 배우 카트린 드뇌브, 잔 모로, 학자 크리스틴 델피, 모니히 위티그 등 당시 프랑스 사회를 이끌던 여성 지식인들이 함께했고, 이후 수많은 시위와 법적 논쟁을 거쳐 1975년 보건장관 시몬 베유 시대에 폐지되었다. '베유 법'이라고 불리는 임신중지법이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국가가 강력한 인구통제 정책을 시행했고, 유럽에서 가장 먼저 출산장려정책을 시행했다. 출산은 국가의 의무로 규정됐고 임신중절을 선택한 여성과 시술한 의사에 대한 처벌은 강화되었다. 1942년 비시정부에서는 임신중절을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중죄로 규정하고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었다. 실제로 여러 차례 임신중절 시술을 받은 여성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야만의 시대'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20세기 프랑스의 낙태죄 폐지 역사를 다시 떠올리는 이유는 21세기 한국사회의 사정이 걱정스러워서다. 2019년 4월 한국에서도 낙태죄는 헌법불합치의 판정을 받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새로운 법 제정 시한이 몇 개월밖에 남지 않은 지금 낙태죄 처리는 '폐지'가 아니라 '수정'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는 것 같다. 정부의 방침이 낙태죄 처벌조항은 그대로 두되 허용기간과 예외조항을 두는 방식으로 간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조항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는 여성들이 더 잘 알 것이다. 몸의 경험을 통해서.

이쯤 되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를 위한 낙태죄 존치인가? 임신 사실을 안 순간부터 출산과 임신중지 중 한쪽을 선택할 때까지 가장 오래 가장 깊게 고민하는 것은 여성이다. 자신이 어머니가 되고자 하는지,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는지, 아이와 함께 행복할 수 있는지 수많은 불면의 밤을 보내며 결정을 내릴 것이다.

"자기낙태죄 조항이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공익에 기여하는 정도가 크다고 보기 어렵고, 오히려 그동안 국가의 인구정책에 따라 실제 가동 여부가 좌우되거나... 상대 남성 또는 주변인의 복수나 괴롭힘의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으며, 임신한 여성으로 하여금...안전하지 않은 방법으로 낙태를 실행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현실이 이러하다면, 낙태를 금지하고 이를 형사처벌하는 방법이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충분히 기여해 왔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2019년 4월 11일 마침 있었던 여성학 수업에서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을 읽어 내려갈 때 몇몇 학생들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을 지울 수 없어 2020년 9월 28일 여성계 원로 100명이 함께 하는 선언문에 서명했다. 선언을 준비했던 청년 여성활동가들이 울컥했다고 한다. 더 이상 젊은이들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기를 요구한다. 임신중지에 대한 권리를 거부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ㆍ전 한국여성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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