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기점ㆍ소악도 12사도 순례자의 길
스페인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다면 한국엔 ‘섬티아고’ 순례길이 있다. 천사(1004)의 섬, 신안군의 기점·소악도에 예수의 열두 제자 12사도를 기리는 작은 예배당이 들어섰다. 정식 교회는 아니지만 소박한 섬 풍경과 어우러져 각기 아름다움을 뽐낸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찬찬히 자신을 둘러보며 걷기 좋은 길이다.
섬이라 교통편은 다소 복잡하다. 고속열차로 목포역에 내려서 신안 130번 버스를 타고 송공항에 내린 다음 병풍도행 여객선으로 환승한다. 첫 번째 예배당이 있는 대기점도에 내려서 소악도까지 걸어갔다가 송공항으로 돌아오는 게 일반적이다.
송공항에서 대기점도 가는 배는 오전 6시50분, 9시30분, 오후 12시50분, 3시30분에 출항한다. 소악도에서 송공항으로 돌아오는 배는 오전 8시25분, 11시5분, 오후 2시25분, 5시5분에 있다. 문의 061-279-4222.
12개의 예배당이 흩어져 있는 5개 섬(대기점도ㆍ소기점도ㆍ소악도ㆍ진섬ㆍ딴섬) 중 딴섬을 제외하면 노둣길로 연결돼 있다. 썰물 때면 드러나는 길로 차와 사람이 함께 건널 수 있다. 12사도 예배당은 이 지역이 ‘2018년 전라남도 가고 싶은 섬’으로 선정된 후 섬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진행됐다. 작은 예배당을 짓기로 결정한 데는 면 소재지인 증도가 한국 기독교 최초의 여성 순교자인 문준경 전도사가 피살된 곳이고, 섬 주민의 80% 이상이 기독교인이라는 점이 고려됐다.
각각의 예배당은 12사도의 특징을 반영한 건축물이자 작품이다. 김윤환, 이원석, 박영균, 손민아, 강영민, 요라이 아브라함 슈발, 브루노 프루네, 장 미셀 후비오, 김강, 얄룩 마스 등 국내외 건축미술 작가가 참여했다. 섬과 섬을 잇는 풍경에 취해 느릿느릿 걷는 길은 자연스럽게 ‘섬티아고 순례길’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전체 거리는 총 12km, 3~4시간 걸린다.
각각의 예배당은 12사도의 이름과 함께 나름의 의미를 담은 별칭을 보유하고 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그리스 산토리니풍의 하얀색 벽에 푸른 지붕이 덮인 첫 번째 예배당 ‘건강의 집(베드로)’이 여행객을 맞이한다. 바다와 어울리는 산뜻한 색감이 인상적이고, 내부의 수채화에도 시선이 간다. 작은 종을 치며 순례길의 시작을 알린다.
천천히 걸어도 되고, 대여소에서 전기자전거를 빌리는 방법도 있다. 자전거 대여료는 3시간 5,000원, 3시간 이상 1만원이다.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예배당 안내판과 이정표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서다.
두 번째는 북촌마을 동산에 자리한 ‘생각하는 집(안드레아)’. 병풍도 가는 노둣길을 배경으로 두 개의 높고 둥근 지붕이 돋보인다. 해와 달의 공간으로 나눈 실내 디자인이 독특하다. 세 번째 ‘그리움의 집(야고보)’은 논길과 큰 연못을 지나 숲에 자리하고 있다. 심플한 디자인에 붉은 기와와 로마식 나무기둥을 양쪽에 세워서 안정감이 느껴진다.
남촌마을 팔각정 근처의 네 번째 ‘생명평화의 집(요한)’은 치맛자락처럼 펼쳐진 계단 위에 하얀색 원형 건물이 단정하게 얹혀진 모습이다. 긴 바람 창으로 외부와 소통하고, 내부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빛의 밝기에 따라 채도가 변한다. 다섯 번째 ‘행복의 집(필립)’은 대기점도 노둣길 위 언덕에 있다. 적벽돌과 갯돌, 적삼목, 동판을 덧댄 유려한 지붕 곡선과 꼭대기의 독특한 물고기 모형은 프랑스 남부의 건축 양식을 모방했다.
노둣길을 건너 소기점도에 들어서면 여섯 번째 ‘감사의 집(바르톨로메오)’이 나타난다. 물 위에 뜬 꽃송이처럼 호수 속의 교회다. 색유리와 스틸의 앙상블과 물에 비친 모습이 압권이다. 가까이 갈 수 없지만 오히려 멀리서 더 예쁘게 보인다. 일곱 번째는 ‘인연의 집(토마스)’.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사각형의 흰색 건물이 단정하게 자리 잡았다. 하늘의 별들이 내려와 박힌 듯한 구슬 바닥과 푸른색 문이 인상적이다.
다리에도 슬슬 힘이 풀리고 지쳐갈 때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순례자의 섬 게스트하우스가 등장한다. 섬의 유일한 카페이자 숙박시설이다. 예약(061-246-1245)은 필수. 기념품으로 12사도 예배당 모형도 판매한다.
소기점도와 소악도 사이의 갯벌에 세운 여덟 번째 예배당 ‘기쁨의 집(마태오)’은 황금빛 양파 지붕이 마치 러시아 정교회를 닮았다. 12개 예배당 중 최고의 포토존이다. 아홉 번째 ‘소원의 집(작은 야고보)’은 프로방스풍의 아름다운 오두막이 연상되는 건물이다. 고목재를 사용한 동양의 곡선미에 물고기 모양의 서양식 스테인드글라스가 조화롭다.
열 번째 ‘칭찬의 집(유다 타대오)’은 뾰족지붕에서 흘러내린 뭉근한 곡선이 아름답다. 푸르고 앙증맞은 창문, 외부의 오리엔탈 타일로 섬세함을 더했다. 솔숲 해변의 열한 번째 ‘사랑의 집(시몬)’은 자연을 안으로 받아들여 시원한 느낌이 든다. 완만한 경사를 이룬 두터운 흰 벽과 커다란 조가비 문양의 부조가 눈길을 끈다.
진섬에서 모래 해변 건너 딴섬에 우뚝 서 있는 열두 번째 ‘지혜의 집(가롯 유다)’은 마지막 예배당답게 아름다움의 ‘끝판왕’이다. 프랑스 몽셸미셸의 성당을 연상시키는 붉은 벽돌과 첨탑이 매력적이다.
순례길의 12개 예배당마다 QR코드가 설치돼 있다. 스마트폰으로 읽으면 지역 사투리로 녹음된 작품 해설을 재미있게 들을 수 있다. 12사도 순례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기점소악도 홈페이지(기점소악도.com) 또는 신안군청 '가고싶은섬' 팀(061-240-8687)에서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