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 추석

입력
2020.09.2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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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인터넷이 사무 공간이나 생활 속에 뿌리 내린 것은 '근거리통신망'인 '랜(LAN)'이 등장하면서부터다. 1973년 특허 등록한 이 시스템은 복사기로 유명한 미국 제록스사의 팰로앨토연구소가 개발한 것이다. 그러나 제록스가 '이더넷(ethernet)'으로 명명한 이 시스템의 원형을 만든 사람은 노먼 에이브럼슨 하와이대 교수였다. 제록스의 랜 통신망은 하와이 4개 섬을 초당 4,800비트의 무선통신으로 연결하는 에이브럼슨 교수의 '알로하 시스템'을 응용한 것이다.

□코로나로 거리두기가 일상이 되면서 생활의 온라인 대체가 신풍속이 되고 있다. 그런 현상을 '랜선○○'라고 부르는 것도 유행이다. 온라인 만남을 '랜선 연애'로 부르기도 했으니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온라인 교제가 오프라인 만남을 결국 전제한 것이었다면 요즘 '랜선○○'은 온라인으로 시작해 온라인으로 끝나는 것이 다르다. 유명 관광지의 풍광을 컴퓨터 화면으로 보고 즐기는 랜선 여행이나 자신의 거주 공간을 소개하는 랜선 집들이가 대표적이다.

□다른 집 아이나 반려동물의 동영상에 좋아요와 댓글을 날리는 랜선 이모, 랜선 집사 같은 경우도 만남을 전제로 하지 않는 온라인에서 완결되는 감정 표현이다. 실제로 '혼술'이지만 온라인 화상회의를 이용해 실시간 모여 먹고 마시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대화까지 나누는 랜선 회식도 있다. 식당이나 유흥업소의 저녁 술자리가 사라지다시피하면서 전체 술소비량은 줄었지만 이런 소비 때문에 편의점 술 판매량은 늘었다고 한다.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귀성 자제령이 내려진 추석도 예외가 아니다. 역병 돌면 옛날에도 안 모였다고 시골 어른들이 먼저 "오지 말라"며 대신 차례상 사진을 찍어 공유하겠다고 한다. 자식들 보지 못하는 서운함을 달래 주려고 영상편지를 만들어 주는 지자체도 여럿이다. 그런데 영상에 담을 때는 나중에 시간 날 때 오라면서 편지 수록을 마치고는 "그래도 오겠지"라고 무심코 속마음을 말하는 어른도 있다고 한다. 랜선이 좋다한들 직접 보는 살가움만 할 리 없다. 누구에게는 시원하고, 누구에게는 섭섭한 추석이다.

김범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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