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에 가려 잊혀진 또 다른 녹두장군 '김개남'을 아시나요

입력
2020.10.0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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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전북 정읍, 잊혀진 '동학의 로베스피에르'

편집자주

진보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며 역사적 장소와 현재적 의미를 찾아보는 ‘한국근대현대사 기행’을 매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한다. 코로나19시대 '의미있는 여행'의 안내자가 되고자 한다.




“손 교수, 동학 때도 NL-PD논쟁이 있었던 거 알아요?”

전북 정읍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10여 ㎞를 달려가면, 전봉준의 고택이 나타난다. 전봉준이 농사도 짓고 마을훈장으로 가난하게 살다가 고부군수 조병갑의 만행을 듣고 농민들과 고부관아를 공격해 동학혁명의 격발쇠를 당긴 곳이다. 그 곳에 서자, 얼마 전 함께 경남 산청의 동학 봉기지를 향하고 있었을 때 단병호 전 민주노총위원장이 내게 물었던 질문이 생각났다.

NL-PD는 1980년대 후반부터 우리 운동에서 치열하게 논쟁이 되어 온 쟁점이다. NL은 민족해방(National Liberation)의 준말로 반미, 통일 등 민족문제를 강조하는 입장으로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에 학생운동을 움직였던 한총련, 그리고 통합진보당이 이를 대표한다. PD는 민중민주주의(People's Democracy)의 준말로 계급 등 자본주의의 ‘내부모순’과 이의 변혁이나 급진적 개혁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운동권의 ‘좌파’가 이들이다. 민주노동당에서 떨어져 나간 진보신당, 한 때 이 당을 대표했던 고 노회찬, 심상정 정의당의원 등도 ‘넓은 의미의 PD’라고 할 수 있다.

두 의원이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지만, 운동권에서 정작 다수를 차지하고 힘이 있는 것은 NL이었다. 따라서 나는 노회찬, 심상정 등 PD는 우리 사회의 ‘비주류의 비주류의 비주류’, ‘소수파의 소수파의 소수파’라고 이야기해왔다. ‘주류 교체’가 일어나고 있지만, 반공세력이 우리 사회의 주류고 민주화세력이 비주류인데, 그 중 민주당 같은 자유주의세력은 주류(‘비주류의 주류’)이고 진보세력은 ‘비주류의 비주류’이며, PD는 이 중에서도 다시 비주류인 ‘비주류의 비주류의 비주류’라는 것이다.


헌데 동학 때 NL-PD논쟁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의아해하는 나에게 단 전위원장이 말했다. “전봉준은 NL이고, 김개남은 PD예요.” 나는 무릎을 쳤다. 맞다. 전봉준은 일본과 서양을 배척하자는 ‘척왜, 척화’라는 구호가 보여주듯이, 반외세, 반(反)제국주의와 민족주의를 중시했다. 누가 뭐래도 전봉준은 동학혁명을 대표하는 최고지도자였다. 특히 그가 서울에 잡혀와 작성된 심문조서는 그의 인품과 절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봉건체제 변혁에서는 한계가 많았다. 물론 그가 처음 동학혁명의 깃발을 든 것은 탐관오리를 척결하기 위해서였고 그 역시 내부모순의 개혁에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후심문에서도 밝혔듯이, 그의 목표는 제대로 된 왕정을 하게 하는 것이었지 왕정을 타파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 병을 물러나게 하고 악한 관리들을 축출해 임금 곁을 깨끗하게 한 뒤, 농촌으로 돌아가 상직인 농업에 종사할 생각이었다.” 그는 탐관오리들과 민씨일가 외척이 문제지, 왕은 문제가 아니라는 왕정주의자였다. 박근혜가 아니라 최순실이 문제라는 인식이다. 이 점에서 그는 시대에 뒤떨어져 있었다. 그는 동학혁명 중에도 대원군과 은밀하게 통신을 주고받았다.


김개남은 달랐다. 그는 전봉준과 한 동네에 살면서 같이 공부한 학동, 즉 동기동창이였고 의형제였다. 그러나 전봉준과 달리, 그는 왕정과 체제 그 자체를 바꾸려는 혁명가였다. 그는 반제국주의 못지않게 반봉건주의가 강했다. 그는 동학지도자 중 가장 급진적이었다. 김개남은 ‘동학혁명의 로베스피에르(프랑스혁명의 급진적 지도자)’였다.

그는 노비, 백정, 승려, 재인 중심의 천민부대를 이끌었다. 그는 남원성을 점령했고 이후 교령산성에서 농민군을 훈련시켰는데 남원부사가 말을 듣지 않자 서슴없이 목을 쳤다. 아름다운 교령산성에 세워진, ‘김개남 장군 주둔지’라는 백비가 이를 증언하고 있다. 그는 대원군의 밀사도 죽이려 했다. 그는 이름조차 “남쪽을 새로 연다”고 개남(開南)으로 바꿨다. 그는 PD이었고 비주류(동학군)속에서도 소수파인 ‘비주류의 비주류’였다.



그런 만큼 그는 동학의 지도자 중 가장 잔혹하고, 전격적으로 처형됐다. 서울까지 압송되어 심문조서와 유서를 남긴 전봉준과 달리, 그는 호송 중 농민군에게 탈취당할지 모른다는 핑계로 체포 이틀 뒤 전주에서 처형됐다.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 매천 황현의 '오하기문'에 따르면, 지역양반들은 “다투어 그의 내장을 씹었고 그의 고기를 나누어 제상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냈다.”

그의 머리는 서울에서 3일간 효시됐다가 다시 전주로 보내져 일주일간 걸렸고 전국 팔도를 돌며 전시를 당해야 했다. 그의 비극은 더 있다. 그를 고발해 처참한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오랜 절친이였던 의병장 임병찬이었다. 청주병영 공격에서 패배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친척집에 숨어있던 그를 임병찬은 자기 집이 더 안전하니 자기 집으로 오라고 유인한 뒤 밀고했다. 절친이 이념적 차이로 총을 겨누고 죽였던 한국전쟁의 비극이 한말에도 벌어진 것이다.



후세의 평가도 마찬가지다. 그는 잊혀졌다. 당시 동학에 참가했던 노인들의 생생한 증언과 새로운 사료에 따라 집필한 한 책에 따르면, 김개남은 혁명 초기에 전봉준 이상으로 주도적 역할을 해 모두 그가 대장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였으나 “전봉준 부친이 농민들 부탁으로 동장을 했다가 곤장을 맞아 돌아가셨으니 그가 대장을 해야 한다”고 양보했다고 한다. 이후 동학에 대한 연구도 일제에 의해 왜곡된 전봉준의 공초 기록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현장에서 처형당해 공초 기록이 없는 김개남은 잊히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이 과장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야말로 왕정을 넘어서 시대적 과제(반봉건)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던 지도자, ‘급진적’이라는 일반적 평가와 달리, 가장 시대에 맞는 진정한 변혁을 꿈꾼 혁명가였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당시의 세계적 추세를 고려할 때, 그가 급진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지도자들이 시대에 뒤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 역시 완전한 신분제 폐지를 주장하지는 못 했다는 점에서, 그 조차도 충분히 급진적이지 못했다. 그가 이루지 못한 이 과제는 이후 해방정국에서의 민초들의 처절한 저항으로 다시 한 번 타오른다. 그는 일제, 해방정국을 거쳐 현재까지 이어져온 이 땅의 ‘변혁운동’ 전통의 선구자이다.



전봉준의 유적은 사방에 널려 있다. 그가 태어난 고창과 그가 활동했던 정읍이 서로 ‘원조 경쟁’을 하고 있다. 정읍에는 그의 이름을 딴 공원이 있고 고택뿐만이 아니라 고택 가까운 곳에 웅장한 그의 묘지와 제단이 있다. 몇 년 전 고창에 가니, 그의 생가 터에 집을 지어놨었다. 이번에 가보니, 고증이 잘못된 집이라는 비판이 일자, 집은 헐고 집터만 남겨 놓았다. 거기서 조금 가면, 전봉준이 동학군에 군사훈련을 시키고 본격적인 무장봉기를 한 곳이라며 대대적으로 정비해 놓았고 전봉준 동상을 건립할 계획이다.


반면 김개남 유적은 별로 없다. 김개남의 생가는 정읍 북동쪽에 있는 산외면 동곡리라는 오지다. 그를 찾아가는 길은 외롭고 처연했다. 그의 생가는 제대로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아 비를 주룩주룩 맞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려야 했다. 생가는 풀이 무성한 밭터로 버려져 있다. 잘 보이지도 않는 곳에 안내판이 있었지만, 풀이 너무 무성해 그쪽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생가로부터 멀리 않은 길가에 시신이 없는 김개남의 가묘가 있다. 1995년 만든 이 묘지의 비에는 재야사학자 이이화 선생님이 쓴 글이 새겨져 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기리는 것으로 알려진 노래다. 원래 녹두장군은 김개남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가 녹두꽃이 많은 동곡리 출신이라 그리 불렀는데, 대장자리를 전봉준에게 양보하며 녹두장군이란 이름도 전봉준이 가져가게 됐다는 것이다. 동학 당시 많이 불렀지만, 잊힌 노래가 김개남을 그리워하며 부른, “개남아 개남아” 노래다.


전주 덕진공원에 전봉준의 동상 옆에 세워져 있는 초라한 김개남 비에는 이 노래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김개남이 잊혔듯이 그 글씨도 색이 바래 읽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주 남문시장 옆 전주천에 서서 그가 처형된 초록바위를 바라보고 있자 외롭게 죽어간 동학의 혁명가, ‘비주류의 비주류’ 김개남의 눈물인 듯 양동이로 물을 퍼붓는 것 같은 폭우가 쏟아졌다. 그리고 어디선가 민초들이 부르는 합창소리가 들려 왔다.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수 만 군사 어디다 두고 /짚둥우리가 웬 말이냐?”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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