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새 연방대법관 후보에 보수 성향 에이미 코니 배럿(48) 제7연방항소법원 판사를 지명했다. 진보의 상징이었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 별세(18일) 후 채 열흘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의 시나리오는 11월 대선 전 상원 인준 절차 마무리다. 배럿 판사가 상원 투표를 통과하면 미 대법원은 보수 6 대 진보 3 구도로 바뀐다. 여성의 낙태 권리, 전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건강보험개혁법(오바마케어)에 부정적인 배럿 판사가 대법될 경우 미국의 사회 정책은 보수화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대선 불복 소송 최종 결정이 대법원에 달렸다는 점도 주목된다. 배럿 후보자 인준이 대선 결과는 물론 향후 미국사회 지형을 좌우할 의제여서 보혁 진영간 힘겨루기가 절정에 달할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예상대로 배럿 판사를 새 대법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보수 대법관의 구심이었던 고 앤서니 스캘리아 대법관 후임으로 2017년 가장 유력하게 검토했던 인사다. 긴즈버그 대법관 별세 직후에도 차기 대법관 후보자 1순위 물망에 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비할 데 없는 업적, 탁월한 지성, 훌륭한 자격, 헌법에 대한 불굴의 충성심을 지닌 여성”이라고 극찬했다. 인디애나주(州) 노터데임대 로스쿨 교수 출신인 배럿 후보자는 2017년 연방항소법원 판사가 됐다.
남편, 자녀 7명과 함께 로즈가든 기자회견장에 나온 배럿 후보자는 “재판관은 정책입안자가 아니고, 자신이 가졌을지도 모르는 정책에 대한 관점을 배제하는 데 단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긴즈버그는 유리천장을 깼고 때려 부쉈다. 그녀는 엄청난 재능을 가진 여성이었다”며 고인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판결 성향은 강경 보수 쪽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 인터넷매체 악시오스에 따르면 배럿 후보자는 보수 진영이 임명했던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2017년 오바마케어를 옹호하자 “보수적인 사법 해석주의를 배신했다”는 글을 썼다. 2017년 연방항소법원 판사 인준 청문회 당시 낙태 문제에 대해선 특별한 언급을 피했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에다 2013년 “생명은 잉태로부터 시작된다”는 인터뷰를 하는 등 임신중절 권리를 부정하는 쪽이다. 총기 규제와 이민 문제 등에서도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진보 진영은 배럿 후보자가 (여성의 낙태 권리를 존중한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 동성애자의 권리, 건강보험 및 각종 이슈에서 이전 판결을 되돌릴 것을 걱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배럿 후보자가 스칼리아 대법관의 재판연구관(로클럭)으로 일하면서 그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도 민주당이 우려하는 대목이다. 배럿 후보자는 이날도 “재판관은 법에 쓰여 있는 그대로 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스칼리아의 사법철학은 나와 같다”고 했다. 헌법을 조문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스칼리아식 ‘원전주의’는 판결에서 변화된 사회상을 그다지 고려하지 않는 근본주의적 보수주의로 분류된다.
상원을 장악한 공화당은 즉시 인준에 나서기로 했다. 다음달 12일 청문회 개최, 29일 상원 투표 진행 시나리오도 내놨다고 미 CNN방송은 전했다. 대선 결과가 나오기 전에 대법관 공석을 채우겠다는 의도다. 공화당은 상원 100석 중 53석을 차지하고 있다. 공화당 상원의원 중 2명이 인준 표결 불참 의사를 밝혔지만 51명만 있어도 통과는 어렵지 않다. 여기에 대법관 인준은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방해)가 적용되지 않아 조기 통과도 가능해 보인다.
다만 대선과 맞물려 논란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NYT는 “트럼프 대통령은 보수 진영을 활성화시키고, 미국에서만 20만3,000명이 숨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서 대법원 구성 문제로 이슈를 돌리기를 희망한다”고 꼬집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우편투표 부정 가능성을 이유로 대선 패배 시 불복 소송을 제기해 대법원 판단에 맡기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배럿 대법관까지 6명의 보수 대법관이 자신의 손을 들어주리라는 속셈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강하게 반발했다.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 후보는 이날 성명에서 “국민이 차기 대통령과 의회를 선택할 때까지 상원은 (인준 절차) 행동에 나서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이날 공개된 폭스뉴스 여론조사에서도 대선 승자가 신임 대법관을 지명해야 한다는 의견이 57%로, 트럼프 대통령이 지명해야 한다는 의견(38%)을 훨씬 앞섰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은 선거 결과와 무관하게 대법원을 보수 절대 우위 구도로 만들겠다는 생각이어서 미 정치권은 10월 내내 충돌이 불가피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