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는 마사지 천국이었다. 아시아권에서도 발, 전신, 오일 마사지 가게가 한꺼번에 수 십명씩 단체관광객을 받고 있지만 아프리카에 비하면 이빨도 나지 않았다.
아프리카는 대륙 전체가 마사지로 연결돼 있다. 수 십, 수 백만이 동시에 마사지로 하나가 된다. 비포장 흙길을 시속 100㎞로 달리면 머리부터 발 끝까지 불규칙한 진동에 세포가 긴장해야 한다. 이름하여 ‘아프리칸 마사지’다.
탄자니아 세렝게티와 응고롱고로는 야생동물의 보금자리라는 차원에서 흙길을 고집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이동경로에도 동물은 수시로 출현했다. 흙 먼지 뽀얗게 뒤집어 써도 동물의 서식지에 아스팔트를 까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나미비아에서도 마사지를 받아야 했다. 이곳에는 오히려 듄45나 빅 대디로 통하는 국립공원 안 도로는 포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국립공원이나 도시를 벗어나면 고속도로나 국도 대부분이 흙길이었다. 먼지는 끊임없이 출입문과 창문 틈으로 스며들었다. 차량 안에서도 마스크를 껴야 했다.
나미비아 수도 빈트후크를 벗어나 나미브 사막 소서스블레이까지 가는 길도, 사막에서 대서양 연안도시 왈비스 베이와 스와코프문트를 가는 길도 4, 5시간 마사지가 예약돼 있었다. 선택은 사절, 의무 코스였다.
차선도 없는 흙길을 시속 100㎞로 달릴 때 가장 아찔한 것은 마주오는 차량과 교행할 때 였다. 흙먼지를 날리면서 차량이 다가오면 먼저 코부터 막아야 했다. 한국 차선만 생각하고 있다가 차량이 교행할 때면 마치 충돌할 것만 같았다. 나미비아도 독일에 이어 남아프리카공화국 지배를 받은 터라 영국식 차선이었다. 누가 말했다. ‘왼쪽은 작게 오른쪽은 크게.’ 영국이나 일본서 운전하려면 왼쪽으로 돌 때는 핸들을 작게, 오른쪽으로 회전할 때는 크게 돌리면 된다는 것이다. 생활의 지혜였다.
존이 출발길 황량한 흙길에서 마술을 부렸다. 길가에 말라 비틀어진 키 작은 나뭇가지를 몇 개 꺽더니 “잘 보라”고 했다. 그리곤 마사지 받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7시간 정도 지난 저녁 무렵 스와코프문트에 도착했을 때 생수병에 꽂아둔 이 나무가 파랗게 푸른 잎으로 살아났다.
스와코프문트는 대서양 연안의 휴양도시였다. 사막과 바다, 독일풍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4륜오토바이와 스카이다이빙, 샌드보딩, 해양크루즈, 전통촌 체험 등 다양한 즐길거리가 있었다.
고민할 것 없이 나미비아 전통촌 체험에 나섰다. 말은 전통촌인데 실상은 빈민촌이었다. 그것도 흑인만 사는 동네여서 흑백의 차이를 또 한 번 느껴야 했다.
스와코프문트 인구는 15만명에 육박한다. 이중 10% 정도인 1만5,000명의 흑인이 전통촌에 산다. TV에서 굶고 있는 아프리카 어린이 사진을 배경으로 후원금을 모을 때 나오는 곳과 같았다. 이곳 전통촌은 1960년대 생겼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흑인들은 이곳에서 가족 단위로 살면서 무상 주거 혜택을 누린다. 집은 최소한의 생활을 할 정도다. 유입 인구가 많아 무한정 살 수는 없어 4, 5년마다 심사를 받는다. 집은 지금도 건설 중이었다.
물개 고개와 시금치, 번데기, 옷가지, 생필품 등을 파는 시장을 한 바퀴 둘러 마을로 들어가니 꼬마들이 모여든다. 누가 볼펜과 기념품도 줬는데, 최고는 사탕과 초콜릿이었다.
나미비아 13개 부족 중 절반을 차지하는 오밤보족 말을 몇 가지 배워 현지인을 만날 때마다 써먹었다. “싱가바요”는 환영한다, “당기”는 고맙다는 말이다. 화려한 원피스에 신발을 거꾸로 올려놓은 듯한 모자가 인상적인 헤레로족의 고아원을 찾았다.
마음씨 좋게 생긴 헤레로족 여인은 부족 얘기를 들려줬다. 제국주의 침략시절 독일의 얘기를 꺼낼 때는 슬픔과 분노가 교차됐다. 1904년 독일 해군은 소수민족인 헤레로족을 습격해 대량학살을 벌였다. 당시 헤레로족의 80%가 사망했다.
독일은 나미비아가 독립한 1990년 이후에도 이 문제에 대한 입장표명을 미뤘다. 그러다 2004년에 겨우 독일 경제개발장관의 연설을 통해 사과를 받았고, 2015년 대량학살을 인정했다.
유럽국가들이 아프리카 식민 시절 흑인에 저지른 인종범죄에 대해서는 서로 관대하다. 동업자 의식 때문이다. 사과 한 마디 받아내는데 100년이 걸렸다.
오밤보족 집에서 엄지손가락만한 번데기와 시금치로 점심을 먹었다. 젊은 친구들이 장단을 맞춰가며 흥겨운 노래도 들려줬다. 이 밴드가 만든 음악CD도 몇 장 샀다.
스와코프문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왈비스 베이라는 항구도시가 하나 있다. 포경선이 오가는 이곳 왈비스라는 이름도 고래라는 뜻이다. 그물에 걸려 죽은 밍크고래 고기에 맛을 들이면 소고기는 저리가라다. 길이 8m 정도 되는 밍크고래는 3,000만원을 호가할 정도다.
물개도 이곳에서 알아주는 동물이었지만 케이프타운에서 보기로 하고 건너 뛰었다. 대신 바닷가를 뒤덮고 있는 플라밍고를 보면서 대서양을 만끽했다. 바닷바람이 너무 차가웠다. 아프리카는 더운 곳이라는 고정관념이 또 깨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