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히 미안" 김정은의 파격 사과 뭘 노렸나

입력
2020.09.25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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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최고 지도자의 대남 사과 극히 이례적
공식 문서로 사과 메시지 전달, 분단이후 처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서해에서 실종된 공무원 피격 사건에 대해 25일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명의의 대남 통지문을 통해 전격 사과했다. 전날 우리 정부가 북한의 만행에 대한 규탄 성명을 내고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 당국에 책임있는 답변과 조치를 요구한 지 하루만이다. 북한이 사건 경위에 대해 반박 형식을 취하긴 했으나, 북한 최고 지도자가 "대단히 미안하다"며 직접 유감을 표명해 최악의 위기로 치닫던 남북 관계는 반전의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실종 공무원 피살 과정에서 보인 북한군의 잔인한 조치 및 우리 정부의 안일한 대응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北 최고지도자의 '깜짝 사과'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는 25일 청와대에 보낸 통지문에서 "우리 측은 북남 사이 관계에 분명 재미없는 작용을 할 일이 우리 측 수역에서 발생한 데 대해 귀측에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며 "우리 지도부는 이와 같은 유감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최근에 적게나마 쌓아온 북남 사이의 신뢰와 존중의 관계가 허물어지지 않게 더욱 긴장하고 각성하며, 필요한 안전 대책을 강구할 데 대하여 거듭 강조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김정은 동지는 가뜩이나 악성비루스 병마의 위협으로 신고하고 있는 남녘 동포들에게 도움은커녕 우리 측 수역에서 뜻밖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여 문재인 대통령과 남녘 동포들에게 커다란 실망감을 더해 준 데 대해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뜻을 전하라고 하시었다"고 밝혔다. 통전부 차원의 유감 표명에 이어 김 위원장의 직접적인 사과 메시지까지 담아 북한으로선 사실상 최고 수위의 유감을 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 분단 이후 북한 최고 지도자가 남한에 사과한 경우는 극히 드물며 공식 문서로 사과 메시지를 전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통일부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이 1972년 5월 4일 북한을 찾은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에게 청대 무장공비 침투사건(1968년 1월 발생)에 대해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라고 말했지만 사건 발생 후 4년이 지난 뒤의 구두 해명이었다.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살인 사건'때는 김 주석이 남측이 아닌 유엔군 사령관에게 유감의 뜻을 전한 수준이었다.

북한은 통상 각종 대남 도발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있을 때 관련 기관 차원의 유감 표명에 그쳤다. 2008년 금강산 관광객인 박왕자씨 피격 사건때는 북한의 사업담당기구(명승지종합개발지도국) 대변인이 "유감이지만 책임은 남측에 있다"고 밝혔다. 2010년 연평도 포격 도발 때도 북측은 관영매체인 조선중앙통신사의 논평으로 유감을 밝힌 수준이었다. 1996년 북한 잠수함 동해 침투 사건 때는 북한 외교부 대변인이 사과 성명을 냈고, 2002년 제2차 연평 해전 때는 김령성 남북장관급회담 북측 단장이 유감을 표명했다.


'정상 지도자' 꿈꾸는 김정은… '사과 정치' 통할까

김 위원장이 최고 지도자로선 극히 이례적으로 직접 사과에 나선 것은 무엇보다 반인륜적 범죄라는 국제적 공분을 무마하는 동시에 정상국가 지도자의 이미지를 만회하려는 판단을 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월북 의사를 표명한 이를 해상에서 무참하게 살해하고 시신까지 불태웠다는 우리 정부의 주장에 대응하지 않고 사과를 차일피일 미룰 경우 인명을 경시하는 야만적 정권의 독재자라는 국제 사회의 비난이 더욱 커질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최용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안보전략연구실장은 "김 위원장은 정상국가 지도자처럼 보이길 바란다"며 "그동안 북한의 입장문 내용과 다르게 신속한 유감 표명, 상황 설명, 재발방지 대책 약속 등 사과의 조건을 세세하게 갖추려 했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김 위원장은 발빠른 직접 사과를 통해 이번 사건 지시와 무관하다고 선을 그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국가정보원도 이날 국회 정보위 비공개 간담회에서 "이번 사건이 김 위원장에게 보고되지 않고 서해 교전처럼 현지 사령관 등 간부 지시로 움직이지 않았나 판단한다"고 보고했다고 정보위 관계자들이 전했다.



친서 주고 받은 남북 정상, 북미 협상 재가동 포석?

김 위원장의 신속한 대처는 남북관계 상황 관리가 필요하다는 정무적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월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의 지휘 아래 북측이 남북 공동 연락사무소를 일방적으로 폭파하면서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을 높일 때도 김 위원장은 대남군사행동 보류를 지시한 바 있다. 청와대는 이날 김 위원장이 최근 문재인 대통령과 친서도 주고 받았다고 밝혀 김 위원장이 남북 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남겨두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김 위원장이 남북관계 개선에 큰 기대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남북관계가 악화돼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은 원치 않는 셈"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조치가 11월 미국 대선 이후 새 판을 짜게 될 북미 비핵화 협상을 염두에 둔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이번 사건에 대한 국제적 비난 여론이 커지면 향후 미국과 협상 테이블을 마련하기도 어렵고 한국 정부의 측면 지원을 받기도 힘들 수 있기 때문이다. 10월초로 예정된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의 방한을 앞두고 북미간 물밑 접촉도 거론되는 터라 미국의 행보를 의식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최용환 실장은 "남북ㆍ북미간 접촉이 완전히 끊기지 않은 상태에서 우발적 상황이 터진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미국 대선을 앞둔 민감한 시기인 만큼 김 위원장도 사태 악화를 원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이례적인 사과에 나서긴 했으나 그 진정성은 향후 행보를 지켜봐야 알 수 있다는 평가가 많다. 잔혹하고 반인륜적 범죄인 만큼 책임자 처벌을 비롯해 적절한 후속 조치 이행이 없으면 국민들의 분노도 가라앉기 어렵다. 김 위원장의 사과 뿐만 아니라 남북 공동조사를 통한 진상규명과 해상 불법행위 단속정보 공유체계 등이 수립돼야 유사 사건을 방지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임을출 교수는 "김 위원장이 제대로 된 후속 조치를 취해야 남북관계 복원에 대한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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