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을 지키는 게 공정의 출발… 사회안정의 전제"

입력
2020.09.2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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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지금 한국 사회에 던져진 가장 큰 화두는 ‘공정’이다. 조국 사태, 인천공항공사, 추미애 파동 등 주요 현안 때마다 공정이 등장한다. 그런데 다들 공정을 얘기하지만, 들어보면 서로 말하는 공정이 다르다. 대체 공정이란 무엇일까, 왜 지금 한국 사회에서 공정이 부각되는 걸까, 공정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가능할까. 그 답을 찾기 위해 학자 국회의원 활동가 등 다양한 분야, 다양한 세대의 전문가들을 만나봤다.

릴레이 인터뷰 <공정을 말하다>의 시작은 우리나라 지성사회를 대표하는 원로사상가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83)다. 이념와 세대와 분야를 뛰어넘어 큰 얘기를 들어봤다

규칙준수는 사회안정을 위한 전제

-모두가 공정을 얘기하니까, 그리고 나만 공정하고 상대는 불공정하다고 하니까, 이젠 공정이 뭔지조차 헷갈린다.

“일단 규칙의 문제다. 규칙을 정하면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데 잘 지켜지지 않으니까, 누군 지키고 누군 안 지키니까 공정 문제를 제기한다. 조국, 추미애 장관 논란도 그런 것 아닐까. (정확한 진상은 모르지만) 어떤 사람은 서류로 정확히 제출해야 병가나 휴가를 받는데 어떤 사람은 전화로도 가능하다고 하니, 정한 규칙을 지키지 않고 다른 규칙이 적용되니 시비가 생긴다.”

-규칙을 지켜야 공정하지만 규칙 자체가 공정한지도 논란이 된다.

“모든 규칙이 다 합리적인 건 아니다. 가령 대입 커트라인이 200점이라고 치자. 200점 맞으면 합격이고 199점은 떨어뜨리는 게 공정이다. 하지만 200점과 199점 사이에 실력 차가 있나. 이 정도 차이로 합격, 불합격을 정하는 건 과연 공정한가. 이러한 규칙은 충분히 논란의 소지가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점을 불합격시키는 건 어떤 형태로든 규칙은 있어야 사회 혼란과 갈등을 배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력문제가 아니라 사회안정의 문제다.”

-규칙이 불공정 불합리하다면 당연히 바꾸고 보완해야 한다.

“국립대학이 성적순으로 학생을 뽑는 게 정당한가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국립대는 세금으로 고등교육을 하는 곳인데, 그렇다면 성적이 좀 모자란 학생은 고등교육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인가. 실제 독일이나 프랑스 대학들은 모든 사람은 고등교육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해 성적 아닌 지원 순서대로 입학시켰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공정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게 하면 대학의 질이 떨어지고 우수인재 양성도 어려울 텐데.

“그게 문제였다. 대학이 국가 중요 업무와 연구를 맡길 사람들을 배출할 수가 없었다. 결국 독일에선 고급 두뇌들이 따로 연구하는 막스플랑크 연구소나 대학교수 자격을 별도로 걸러내는 하빌리타치온(Habilitation) 같은 제도들이 생겨나게 됐다. 프랑스도 최고 엘리트과정인 그랑제콜이 따로 있고 여러 연구기관들이 생겨났다. 모든 국민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평등, 공정의 원칙은 유지했지만 이걸로는 국제경쟁력과 인재양성 같은 국가적 요구를 충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보조기구들이 생겨난 것이다.”

-공정성만으론 국가 운영이 역부족이란 뜻인가.

“국가나 사회차원에서 공정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자. 첫 번째는 사회갈등 해소를 위함이다. 공정은 누구나 규칙은 지켜야 한다는 원칙이고 그래야 사회안정이 가능하다. 두 번째는 공정을 통해서도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재능을 확보하면 가장 좋은데 그게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독일 프랑스처럼 공정을 보완하는 제도들을 만들게 된다.”



남북단일팀, 의사파업과 두 개의 공정

-최근 수년 사이 제기됐던 공정 논란은 좀 당혹스러운 면이 있다. 시작은 평창올림픽 당시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구성 때였던 것 같다. 단일팀에 북한선수가 들어오는 바람에 우리 선수 일부가 탈락하게 되자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불공정 비판이 강하게 나왔다. 단일팀의 대의만 생각했던 기성 세대로선 당황스런 부분이었다. 인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논란도 뜻밖이었다. 정규직화에 따른 경영부담 내지 노동경직화와 관련한 논란을 예상했지, 정규직들이 반발할 것이라곤 전혀 생각못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공정성이 굉장히 복잡한 이슈란 걸 우리 사회 전체가 느끼고 있다.

“인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해주자는 건 이들의 생활기반을 좀 더 튼튼하게 해주자는 취지다. 사회정의 관점에서 보면 옳다. 다만 정규직 입장에선 그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게 불공정하게 여겨질 수 있다. 누가 옳다 틀리다 쉽게 얘기할 수는 없는 문제다. 중요한 건 기본적으로는 정해진 규칙을 따르는 게 공정이지만, 공정 뒤에 있는 사회적 현실, 인간적 현실도 봐야 한다. 사람은 존중되어야 하고 적정 수준에서 살 권리가 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노동자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노력 차원에서 봐야 하고 그 점에선 인천공항을 우선적으로 해본 게 나쁜 건 아니라고 본다.”

-그래도 정부가 좀 더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구성원 의견을 충분히 들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먼저 발표부터 해놓고 수습을 하려니까 갈등이 커졌다.

“모든 정책은 늘 넓게 자문을 받아야 한다. 자기 사람한테서만 자문 받는 게 아니라 나라 전체의 지혜를 참조해야 한다.”

-미국 대학의 소수우대정책인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을 둘러싼 오랜 논란도 그런 것 아닐까. 공정성 논란이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닌 듯 싶다.

“어퍼머티브 액션은 단순히 소수인종 배려가 아니다. 사회적 불평등 계층의 학생들을 특별히 고려하자는 배경에서 나왔다. 공정하게 시험봐서 성적에 따라 입학을 허가하되, 흑인 히스패닉같은 사회적 불평등 계층에는 점수를 더 준다. 하지만 백인들은 이 제도에 오히려 불공정과 박탈감을 느낀다고 한다.”

-의사파업 때도 공정문제가 나왔다. 의사들은 자신들이 중고등학교 내내 1등하고 의대 와서도 밤잠 설쳐가며 의사가 됐는데 누군 공공의대 같은 다른 경로를 통해 의사가 되는 게 몹시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반대로 국민들은 의사부족으로 지방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게 불공정이라며 의사들의 이기심을 지적한다. 특히 여러 국가고시가 있는데 의대생들에게 기회를 다시 주는 게 오히려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여러 종류, 여러 단계의 공정이 얽히고설킨 것 같다.

“의사 파업의 쟁점들은 다 양면성이 있는 문제다. 프랑스어로 르상티망(ressentimen)은 인간의 시기 질투 복수심 같은 것을 의미하는데, 다만 이런 르상티망에 입각한 공정이나 평등요구는 바람직하지 않다. 나는 이 정도 밖에 먹지 못하는데 넌 왜 그렇게 잘 먹느냐는, 당연히 내가 더 먹어야 한다 식의 공정 요구는 옳지 않다.”



정부는 과연 공정했나

-현 정부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지. 문재인 대통령은 늘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를 얘기했고 지난주 청년의 날 행사에서도 공정을 37번이나 말했다. 그런 정부였기 때문에 국민들은 더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 같다.

“사회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들만의 집단의식이 있다. 그룹이 생기고 진영도 생기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진영만 지키려고 한다. 지금 정부도 그런 것 같다. 이건 좋은 사회로 나아가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스스로 검열하고 자제하면서 먼저 규칙을 지킨 다음 다른 사람도 규칙을 지키게 해야 한다. 정부가 기계적으로만 공정을 외치지 말고 좀 더 깊은 의미에서 공정을 생각했으면 좋겠다."

-좀 더 깊은 의미의 공정이란.

"공정성은 모든 사람이 온전하게 사는데 필수적인 요건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 사회적인 삶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규칙은 지키는 게 공정이다. 하지만 그 규칙을 정하고 집행할 때 인간 전체, 사회 전체, 생명 전체, 환경 전체의 가치들을 숙고하고 반영해야 한다."

대담=이성철 콘텐츠본부장
정리=고선영 대리

◆인터뷰 순서
1.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2.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전 국회의원
3. 주진형 열린민주당 최고위원·전 한화투자증권 대표
4. 장혜영 정의당 의원
5. 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
6.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7. 김범수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이성철 콘텐츠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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