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연방대법관 지명의 정치학
대통령 선거가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지금, 미국 선거의 최대 쟁점은 연방대법관 지명 이슈다. 18일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BG) 대법관 사망 직후부터 백악관과 공화당, 민주당은 대법관 지명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에 돌입했다. 미국에서 대법관 지명은 대통령 선거보다도 치열한 싸움으로 비유된다. 대체 연방대법관은 어떤 자리이길래, 그리고 긴즈버그 후임 지명은 왜 유독 ‘뜨거운 감자’이길래 이렇게 선거판이 요동치는 것일까.
미국 전역은 지금도 긴즈버그에 대한 애도의 물결에 휩싸여 있다. 그의 어린 시절의 흔적이 배어 있는 뉴욕시 브루클린의 바클레이 커뮤니티 센터에는 “권리를 위해서 싸우되 다른 사람들이 당신과 함께하도록 이끄는 방식으로 싸우세요!”란 글귀가 선명하게 걸렸다. 쿠오모 뉴욕주지사는 긴스버그를 기리는 동상 설립계획과 함께 지난 주말 내내 그녀가 좋아한 파란색으로 공공건물을 비추도록 지시했다. 워싱턴DC 연방대법원 청사 앞에는 매일 심야까지 꽃을 든 시민들이 몰리고 있다.
27년 연방대법관 재임 기간 동안 낙태 권리, 동성애자 권리, 종교자유 등 소수자 권리확보를 위한 그의 업적은 넘친다. 핵심은 인간의 보편적 평등권이다. 여성도, 성소수자도, 이민자도, 유색인종도 하늘아래 모든 인간은 같은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만인평등권’의 법철학적 원칙과 기본을 관철시켰다. 인종주의자들은 낙태문제를 생명존중 이슈로, 여성권리를 가족옹호 논리로, 소수인종 우대를 만인평등 시각에서 공격했지만 그는 조금도 굽힘 없이 자신이 갈 길을 닦아냈다,
그의 삶 자체가 언제나 파장의 연속이었지만, 마지막 유언까지도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긴즈버그는 사망 며칠 전 손녀에게 “나의 가장 열렬한 소원은 새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까지 나를 대신할 사람이 임명되지 않는 것이다(My most fervent wish is that I will not be replaced until a new president is installed)”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의 후임을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함으로써 연방대법원의 균형이 깨질 것을 심각하게 우려한 것이다. 그의 사망 전까지 연방 대법원은 보수 5명, 진보 4명이었는데,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후임 임명을 강행한다면 보수6, 진보3이 돼 미국 최고법원은 매우 오른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유언에 대해 발끈하며 “실제로 그녀가 그 말을 했는지, 아니면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나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애덤 시프 정보위원장이 쓴 건지 모르겠다”고 조작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미국의 사법체계는 큰 사건을 다루는 연방법원과, 비교적 경미한 사건을 다루는 주 법원으로 이원화돼있다. 연방 대법원은 이런 미국 법원의 최종심이자, 50개 주의 주법과 헌법간의 불일치를 심사하고 규정하는 역할을 한다. 대통령 행정명령이라 해도 대법관 회의에서 헌법 불일치로 결론을 내면 무효가 된다.
연방대법원의 힘은 미국의 사회이념, 문화가치, 종교윤리를 최종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데서 나온다. 이민자의 권리, 동성애자의 권리, 낙태권리, 종교의 자유와 한계, 환경 및 기후변화, 총기 규제 등 미국 사회에서 가장 핵심적이면서 논쟁적인 가치들에 대한 최종입장을 정하고, 그럼으로써 시민들의 삶의 내용까지 규정할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갖는다. 때문에 연방대법원은 균형이 중요하다. 대법원을 구성하는 9명 대법관의 이념적 균형이 확보되어야 미국사회 전체가 균형과 안정을 이룰 수 있다. 연방대법원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주요 사안마다 기울어진 결정을 내린다면, 결국 사회 전체가 기울어지게 된다. 대통령은 사회의 안정과 균형을 위해 초당적 관점에서 학문적 지식과 도덕적 권위, 인간적 품성, 절제와 청렴결백 등 자질을 갖춘 대법관을 지명해야 한다. 그러한 대법관에 대해 국민들도 ‘신의 바로 아래 위치한다’고 인정해왔다.
9명의 대법관은 종신직이다.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스스로 사임하거나 사망하지 않는 한 교체되지 않는다. 때문에 대통령 4년 임기 동안 대법관 임명의 기회를 갖기란 쉽지 않다. 8년 연임을 해도 기껏해야 2명 정도 임명 기회가 생길까 말까 한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벌써 연방대법관을 2명이나 임명했다. 만약 긴즈버그 후임까지 지명한다면 그는 4년 임기 내 3명의 대법관을 바꾸는 가장 운 좋은 대통령이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방대법관뿐 아니라 230명에 달하는 연방판사를 이미 임명했는데, 백악관 고위관리가 “트럼프 대통령은 연방판사를 임명하는 일을 가장 즐긴다(enjoy)”고 얘기했을 정도다. 그러다 보니 민주당과 진보 진영에선 ”사법부를 트럼프에게 도둑 맞았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조기투표가 실시되는 미네소타 유세현장에서 긴즈버그 사망소식을 들은 트럼프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 후임 대법관을 곧 지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거의 같은 시간 캔자스에서 자신의 선거운동을 하던 미치 멕코넬 공화당 상원대표는 대통령이 후임을 지명하는 대로 상원에서 인준을 실시하겠다고 했다.
긴즈버그 후임 지명은 트럼프 진영에겐 정치적 호재다. 우편투표 논란이나 선거불복 등이 현실화될 때를 대비해 대법관을 자기 쪽 사람으로 임명하는 건 트럼프에겐 사활이 걸린 일이다. 보수적 기독교 성향이 강한 공화당 지지기반인 ‘바이블벨트’에서는 지금이야말로 긴즈버그 재임 동안 그리고 오바마 8년 동안 낙태 동성애 이민 교육 등 ‘미국에서 망가져 버린 기독교적 가치’를 바로잡을 기회라고 보고 벌써부터 민감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앙과 자유연합‘이라는 거대 비영리단체를 이끄는 랄프 리드 회장은 트럼프 지지 대규모 집회를 잇따라 열고 거액 후원금을 거두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2016년 스캘리야 대법관이 사망했을 당시, 미치 맥코넬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선거의 해에 공석이 된 대법관은 다음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해야 한다면서 상원인준을 거부했다. 그때 논리대로라면 지금 그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들에게 말을 바꾸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쉽다.
트럼프 대통령은 여성지명 계획을 이미 밝힌 상태인데, 미국 언론에서 3명의 연방항소법원 여성판사로 압축하고 있다. 에이미 코니 배럿(47)은 사회가치 이슈에 조건을 붙이는 보수성향의 가톨릭 신자다. 2018년 브렛 캐버노 대법관 임명 때 대법관 후보명단에 올라 이미 대통령 인터뷰도 마친 상태다. 바바라 라고아(54)는 플로리다 출신으로 미국 내 쿠바 이민사회가 자랑하는 인물로 시민사회활동에 적극적이고 특히 민권문제에 민감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플로리다는 대통령 선거인단 수가 29명이나 되는데다 매 대통령선거 때마다 1~2%의 박빙승부가 나는 경합지역이어서 대선승리를 위해선 매우 중요한 곳이다. 플로리다에선 쿠바 이민자가 전체 유권자의 8%나 되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플로리다 필승전략 차원에서 라고아 카드를 뽑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30대의 앨리슨 러싱(38)은 LGBT(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젠더)를 절대 금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어 보수 기독교인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진보 진영에선 과거 오바마 대통령이 재임에 들어갈 무렵, 이미 고령이었던 긴즈버그 대법관에 대해 용퇴를 요구했다. 향후 흑인대통령에 대한 반작용으로 미국사회가 급격히 보수화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진보대법관을 유지하려면 오바마 대통령이 지명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긴즈버그의 거부로 무산됐지만, 결국 그 때의 우려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김동석 미국한인유권자연대 대표
미국 선거와 연방의회 전문가로 미 하원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통과와 한미 비자면제 프로그램 등을 주도했다. 또한 미주 최대 한인 유권자 네트워크인 한인유권자연대(KAGC)를 이끌면서 한인 투표권 옹호와 풀뿌리 민주운동을 통해 한인 권익신장에 기여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