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헌관(獻官)이 양성 화합의 초석이 되기 바랍니다."
내달 1일 경북 안동시 도산서원에서 퇴계 이황 선생을 추모하는 경자년 추계 향사(서원의 제사)에서 여성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초헌관을 맡게 된 이배용(73ㆍ전 이화여대 총장) 한국의서원보존통합관리단 이사장은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 제사에서 술잔을 가장 먼저 올리는 초헌관은 제사를 이끈다.
남성의 공간이던 서원의 빗장을 500년 만에 푼 이 이사장은 "여성의 참여를 허용하지 않던 서원에서 초헌관을 맡은 것은 역사적으로도 획기적인 일"이라며 "양성 화합과 상생의 문이 열린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앞서 도산서원 운영위원회는 지난 1월 세계유산 등재 공로를 인정해 만장일치로 이 이사장을 초헌관으로 지정했다. 이번 향사에는 이정화(분헌관) 동양대 교수, 서원관리단 박미경(집사)씨도 함께한다.
첫 여성 초헌관의 등장에 세상이 주목하고 있지만, 이 이사장은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스스로 서원을 존중해왔고, 서원이 이를 받아들인 선순환 구조가 형성된 것뿐입니다.” 투쟁이 아닌 인정과 존중의 결과라는 것이다. ‘여 헌관’에 대한 유림의 거부감이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이사장이 서원의 역사적 가치를 먼저 알고 세계유산 등재에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여성 초헌관 선정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는 후문이다.
여성이 처음 술잔을 올리게 되는 만큼 제사 복식에도 관심이 쏠린다. 향사가 흉사(凶事)가 아닌 길사(吉事)라는 점에서 화려할 것으로 보인다. 이 이사장은 지난 3월 ‘알묘(위패에 인사 올리는 것)’에는 초록색의 약식 제관복을 걸쳤으나, 이번에는 조선시대 부녀자들의 예복인 ‘원삼’을 입는다.
향사 순서는 여느 때와 동일하다. 하루 전 30일에는 알묘와 분정(역할을 분담하는 것), 척기례(제기를 씻는 것), 봉정례(술을 봉하는 것), 이 이사장의 특강, 습례(예행연습)가 진행된다. 도산서원의 가치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의미에 대한 이 이사장의 강의도 준비돼 있다. 서원은 지난해 한국의 14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내달 1일에는 오전 8시부터 상을 차리기 시작해 11시 퇴계와 월천 조목의 위패가 있는 상덕사에서 향사를 치른다. 상덕사는 2002년에야 여성에게, 올해부턴 일반 남녀에게도 문을 열었다.
이 이사장은 자타 공인 서원예찬론자다. "우리는 도심의 시멘트 건물 속에서 많은 것을 잊고 지냅니다. 서원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보면서 인간다움을 찾을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 넘어온 서원이지만 그 문화의 꽃은 이 땅에서 핀 사실도 그는 주지하고 있다. “중국 서원은 공자를 지향하지만, 우리 서원은 각 지역의 선현을 모시고, 수백년 역사를 지켜온 지역 밀착형 서원입니다.”
여성에게 문을 연 서원은 이제는 젊어져야 한다는 게 이 이사장의 생각이다. “젊은 사람들이 외면하면 그 어떤 것도 미래를 보장받기 힘듭니다. 청년들의 눈높이에 맞게 고전을 새롭게 해석, 계승하는 작업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묘안을 내기 위한 그의 발걸음도 분주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