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부터 조선인들은 이름에 일본식 성씨를 써야만 했다. 이것을 창씨개명이라고 한다. 우리 민족의 수치였다. 창시개명은 나쁜 짓이다. 이런 나쁜 짓을 일본만 생각해 낸 게 아니다. 178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법은 유대인들에게 독일식 성을 갖도록 강제했다. 같은 법을 1808년 나폴레옹도 채택했고 19세기 후반에는 유럽의 많은 나라로 퍼져나갔다.
덕분에 우리는 이름만 보면 그 사람의 혈통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슈타인(돌), 만(사람), 바움(나무), 베르크(언덕), 비츠(위트), 펠트(벌판)로 끝나는 이름은 대략 유대인이라고 보면 된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피아노 연주자 호로비츠, 초현실주의 화가 펠릭스 누스바움 같은 사람이다. (모든 규칙에는 예외가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유대인이 아니다.)
언덕을 뜻하는 독일어 베르크(Berg)로 끝나는 이름을 특히 많이 볼 수 있다. 영어식으로는 –버그로 발음된다.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놀이 언덕),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사탕 언덕)가 대표적이다. 이들만큼이나 중요한 인물로 루브 골드버그(금 언덕)가 있다.
루브 골드버그는 1883년에 태어나 시청의 엔지니어로 수도관 지도를 만드는 일을 하다가 신문사에 취직해 허드렛일을 했다. 멀쩡한 직장을 때려 치고 허드렛일을 택한 이유는 한 가지. 틈만 나면 만화를 그려서 편집장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거의 매일 밤 퇴짜를 맞았지만 결국에는 뉴욕 이브닝 메일이라는 큰 신문사의 만화가가 됐다.
루브 골드버그는 우리가 일상에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일을 얼마나 복잡하게 만들면서 살아가는지 빗대어 보여주는 만화로 유명하다. 이런 종류의 첫 번째 작품은 ‘버트 교수와 혼자 작동하는 냅킨’이다. 숟가락을 입에 대면 끈이 당겨지면서 올가미가 올라가고 과자가 앵무새를 스쳐 지나간다. 과자를 먹은 앵무새가 물을 마시기 위해 고개를 숙이면 (…) 작은 로켓이 발사되고 로켓에 연결된 팔이 냅킨을 움직여서 입 주변을 닦아 준다.
그는 창문을 닦는 장치도 만들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바나나 껍질을 밟고 미끄러지면서 막대를 밟는다. 그러면 막대 끝에 달려 있는 말발굽이 날아가서 다른 줄에 걸리게 되는데 그 무게 때문에 물뿌리개가 흔들거리면서 물을 흠뻑 뿌려 준다. 이때 그 밑에서 잠을 자던 개는 비가 오는 줄 알고 피하면서 간판을 넘어뜨리는데 넘어진 간판이 재떨이를 건드리면 대걸레가 흔들거리면서 유리창을 닦는다.
정말 말도 안 되게 복잡하고 실용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설계다. 언뜻 보면 도미노처럼 보인다. 피자를 말하는 게 아니다. 물체들이 연속적으로 쓰러지면 그 반응의 궤적으로 뭔가 재미와 아름다움을 전하는 놀이 말이다. 루브 골드버그 장치도 연쇄적인 반응을 추구한다. 하지만 앞의 물체가 뒤의 물체를 넘어뜨리는 단순함 이상이다. 냉철한 수식과 계산 그리고 공학적 설비가 전제되어 있다.
정말 말도 안 되게 비실용적인 루브 골드버그 장치가 일반인은 물론이고 과학자와 공학자의 인기를 끈 데는 이유가 있다. 그들이 비합리적인 세상과 대적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로 골드버그 장치라는 유머를 채택한 것이다.
요즘 골드버그는 ‘아주 간단한 일을 복잡한 방법으로 해결하는’이라는 뜻의 형용사로 쓰이지만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은 루브 골드버그를 동지로 여기면서 아직도 그를 따라 하려 한다. 골드버그 장치는 복잡하고 비실용적이지만 그 장치를 만드는 과정에 과학을 증명하고 실천하고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립과학관에서 가끔 열리는 ‘가족 골드버그 대회’는 가족이 함께 골드버그 장치를 만들면서 다양한 기계 작용을 구현해 보고 그 과정에서 과학적 원리를 깨닫게 하는 행사로 꽤 인기다. (물론 코로나19 때문에 올해는 하지 못하고 있다.)
버그로 끝나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생물학적인 성 (sex) 대신 젠더(gender)를 처음 제안하고 사용한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 대법관이다. 그는 지난 18일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작성한 단호한 소수 의견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긴즈버그의 버그는 언덕이 아니라 성으로 둘러싸인 도시(Burg)에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