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일 IBK기업은행 서울 남대문지점의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코너. 나란히 줄지어 있는 ATM마다 모두 ‘5만원권 발행이 잠정 중단됨에 따라 출금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안내글이 붙어 있었다. 지난 6월 한 지역농협 지점에 같은 내용의 안내문이 게재됐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지만, 여전히 시중은행에서는 5만원권 공급 차질의 이유로 '발행 중단'을 들고 있는 것이다.
#. 이날 서울 KB국민은행 동여의도지점 ATM에서도 ‘공급 부족으로 당분간 5만원권 지급이 불가능하다’는 안내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실제 5만원을 인출하려 하자 “1만원권 출금만 가능하다”는 화면이 떴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5만원권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최근 시중에는 좀처럼 ‘신사임당(5만원권)’을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돈을 다루는 전문집단인 시중은행조차 발행 중단을 언급할 만큼 심해진 5만원권 실종 사태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걸까.
21일 은행권에 따르면, 최근 각 은행 지점마다 5만원권 공급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5만원권 출금이 불가능한 ATM이 다수이고, 영업점 창구에서도 1인당 인출 수량을 제한한다. 한 은행 창구 직원은 “고객이 5만원권만 찾으면 1만원권을 섞어 드리거나 인근 지점에 빌리러 가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5만원권 부족 사태는 특히 올해 들어 부쩍 심해졌다. 한국은행이 발행한 5만원권은 통상 '시중은행→개인ㆍ기업→금융기관→한은' 식으로 유통되는데, 지난해까지 60%가 다시 한은 금고로 돌아오던 것(환수율ㆍ발행액 대비 환수액 비율)이 지난달엔 29.6%로 뚝 떨어졌다. 발행된 5만원권 10장 중 7장은 어딘가 숨어 있다는 의미다.
일부 은행의 안내처럼 한은이 5만원권 발행을 중단한 것도 사실이 아니다. 올 들어 8개월간 5만원권 발행액(16조5,827억원)은 작년 같은 기간(16조3,211억원)보다 오히려 많다.
정복용 한국은행 발권기획팀장은 “5만원권을 오히려 평년보다 훨씬 많이 발행하는 편”이라며 “코로나19로 비대면이 확대되면서 현금 결제 비중이 줄어 화폐 환수 경로가 약해진데다, 저금리로 고액권을 그냥 들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결국 돈이 돌지 않으면서 이 같은 ‘5만원권 품귀 현상’이 발생한 셈이다.
'발행 중단' 안내문을 붙여 놓은 기업은행 남대문지점 관계자는 "한은이 5만원권 발행을 안한다기보단 수급이 불안정하다는 의미였다"며 "조만간 안내 문구를 바꿀 예정"이라고 말했다.
5만원권 실종 사태는 코로나19 사태와 관련이 깊다는 분석이 나온다.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가계와 기업이 비상용으로 예비 목적의 현금을 쌓아두는 경향이 짙어진데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의 영업이 부진하면서 매일 수입을 정산해 은행에 넣는 현금 자체가 줄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세금 부담 우려가 커지면서 탈세 목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있다. 김대지 국세청장은 지난달 말 국회에서 5만원권의 낮은 환수율 문제를 지적받자 “고액 화폐 수요 증가 원인은 저금리 기조도 있지만, 탈세의 목적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이 같은 품귀현상이 길어지진 않을 전망이다. 재고량 부족 현상이 이어지자 한은이 올 상반기 5조원 가량을 추가 발주했기 때문이다. 한은이 계획보다 화폐 발행량을 늘린 것은 2015년 이후 처음이다.
발행까지 시차를 고려하면 이달 중 시중에 5만원권이 풀릴 것으로 보인다. 정복용 팀장은 “추석 기간에 현금 수요가 압도적인 만큼 (이달 중) 본격적으로 물량이 나가 수급 불균형이 해소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