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검열을 국가에서 했다면 지금은 시민과 독자가 한다. 시민 독재의 시대가 열린 것으로, 이 부분은 굉장히 문제가 크다. 힘겨운 시기에 만화를 그리고 있다.”
기안84의 만화 ‘복학왕’과 삭의 ‘헬퍼2: 킬베로스’에 이어 이번엔 만화 ‘신과 함께’로 유명한 주호민 작가의 발언이다. 지난 18일 한 인터넷방송에서 '최근 웹툰 검열 사태에 대한 생각'을 묻자 "시민 독재"라는 강렬한 대답을 내놓은 것.
특정 만화를 언급한 건 아니지만, 기안84와의 친분 때문에 사실상 기안84를 옹호한 것 아니냐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주 작가는 파문이 커지자 다음 날 특정 작품보다는 "전반적인 분위기에 대한 것"이라 선을 그었다.
그럼에도 논란은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당사자인 기안84, 삭 두 작가 모두 공식사과문을 내놓고, 연재중단 등의 조치를 취했음에도 주 작가의 발언이 터져 나온 건, 최근 논란에 대한 만화작가들의 불편한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잔인하고 선정적이어도 다른 장르는 괜찮고, 만화는 그저 만화라는 이유로 업수이 여겨진다는 오랜 불만까지 녹아 있다. 이번 기회에 웹툰의 자율규제 문제를 제대로 논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앞서 ‘헬퍼’를 그린 삭 작가는 사과문에서 “표현 수위에 있어 만화 쪽이 다소 엄격한 점이 아쉬워 표현의 범위를 확장하고자 노력해왔는데, 역효과를 낳은 것 같아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밝혔다.
삭 작가의 말처럼 만화계는 오랫동안 ‘표현의 자유’에 목말라왔던 장르다. 1960년대 아동만화의 ‘정화’ 운동에서 1970년대 성인만화 사전심의까지. 분위기 전환이 필요하다 싶으면 권력자들은 만화를 두들겨왔다. 이 때문에 만화가들은 규제라는 말에 바르르 떤다.
그래서 마련된 것이 2012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한국만화가협회가 체결한 ‘자율규제협력에 대한 업무협약’이다. 정부가 개입하면 검열 논란이 일테니 협회에다 일임하는 방식이다. 웹툰에 대해 민원이 제기되면 협회 내 웹툰자율규제위원회가 조사한다. 그 뒤 플랫폼에 서비스 종료, 청소년 접근 제한, 성인 인증 권고, 연령 등급 조정, 내용 수정 등 다섯 가지 권고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민원이 제기된 뒤에야, 그것도 강제성 없는 방식의 '권고'는 급성장한 한국 웹툰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KT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국내 웹툰 시장 규모는 1조원대(거래액 기준)로, 2010년 1,000억원 규모에 비해 10배나 성장했다. 시장을 따라잡을래야 따라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정부도 손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자율규제 강화 방안을 계속 모색해왔다. 지난해에는 기존의 청소년관람불가와 전체이용가 두개 등급으로만 나누던 걸 전체이용가, 12세 이상, 15세 이상, 18세 이상으로 세분화 했다. ‘주제’ ‘폭력’ ‘선정성’ ‘언어’ ‘약물’ ‘사행성’ ‘차별’ ‘모방위험’ 등 8가지 기준을 바탕으로 한 자가진단표도 만들고, 이에 따라 연령별 등급을 매기도록 했다. 작품 기획단계에서부터 작가가 자기 작품의 연령 등급을 정하고, 유통사들이 최종 결정을 내리도록 했다.
하지만 이런 기준은 때론 무력하다. ‘헬퍼’는 자가진단에 따라 18세 이상, ‘복학왕’은 15세 이상으로 정했지만, 정작 이 작품에 반발한 이들은 엄연한 성인독자들이었다.
원인은 한국 사회의 급격한 변동이다. 여성 혐오 등의 문제에 대한 사회적 눈높이는 크게 높아지고 있는데, 작가나 플랫폼들은 이를 따라가지 못할 수 있다. 가령 연령등급 기준 가운데 ‘차별’ 항목을 보면 “종교, 성별, 성적 지향성, 인종/민족, 장애, 직업에 관한 차별적이고 비하적인 대화나 행위”라 적어뒀지만, 그 내용과 수준에 대한 세부적 진단 항목은 따로 없다.
실제 정부의 자율규제 정책 연구에 응한 한 만화가는 “지금까지는 ‘폭력성’과 ‘선정성’이 문제였지만 앞으로는 ‘혐오표현’과 ‘인종주의’ 등이 더 큰 문제가 될 테니 ‘차별’ 부분은 ‘혐오표현’으로 바꾸고 기준도 더 강화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 때문에 앞으로도 혐오나 차별 관련 항목들은 계속 강화될 수 밖에 없으리라는 전망이다. 웹툰자율규제위원장인 홍난지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콘텐츠스쿨 교수는 “연령등급 기준 자체가 3년이나 5년에 한번씩 고치는 것"이라며 "지금 기준이 마련된 게 2019년이니 이후 개정 때는 더 구체적인 조항이 들어가는 방향으로 바뀔 것"이라 말했다. 실제 자율규제위는 지난 18일 회의를 열고 차별과 혐오 항목을 집중 논의했다.
그에 앞서 웹툰계가 먼저 달라지는 모습을 선보일 필요도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여느 장르 구분 없이 결국 표현의 자유는 궁극적으로 콘텐츠의 최종 소비자들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2016년 온라인에 ‘웹툰 작가가 스스로 조심해야 할 혐오표현’이라는 자료를 직접 만들어 배포한 12년차 웹툰작가 하마탱은 SNS에서 “작가는 최대한의 표현의 자유를 가져야 하지만 당대의 사회적 시선과 목소리가 어떤지 묵살하는 것은 오만한 표현의 자유"라며 "작가 스스로 성찰하고 결심하고 변화하고자 하는 주체적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