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다가온 어제의 세계
습도 65%의 밋밋한 밤이었다. 책상에 겨우 앉아 미루었던 소설을 긁적이고 있는데 갑자기 “짜악!” 소리가 나면서 불이 나갔다. 채찍이 유기체를 코브라처럼 휘감았다 당길 때 접착적 원심력으로 살이 딸려 나가면서 나는 소리랄까. 듣기만 해도 영원히 상처가 아물 것 같지 않은 차가운 소리였다. 밖을 보니 주거지 전체가 틈 없는 먹지 색으로 덮여 있었다.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크고 작은 스케일에 물린 지 오래지만 정전은 또 처음이었다. 언어가 완전히 사라진 세상을 상상한 적은 있었으나 빛이 없는 세상이라니. 그러나 런던 대공습처럼 온통 캄캄한 도시는 오히려 뒤늦게 찾은 놀이터 같았다.
그때 아래층에서 엄마가 다급하게 나를 찾았다. 호랑이도 무섭지 않다는 사람 목소리가 초조로 긁혀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기어가듯 달려갔다.
“양초 어디 있니?”
검은 형체가 채근했다. 나는 엄마를 위해 뭐든 찾아줄 두 개의 팔이 있었지만 양초는 안 될 말이었다. 우리 집에는 작황 좋은 가지처럼 우람한 양초가 열 개나 됐는데, 친구들 올 때 향초나 피웠지 그 양초에 불 붙일 일은 없었다. 교실 나무 바닥에 초를 먹일 것도 아니고, 정전은 상상도 못하는 요즘 삶이라. 그런데 공교롭게도 보름 전, 신발장에서 천덕스럽게 웅크리고 있던 양초 더미를 내다버린 터였다.
엄마는 초가 없다는 말에 뭐든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나의 부주의를 탓했다. 나는 우물쭈물 서재로 올라와 반쯤 탄 향초를 찾았다. 일회용 플라스틱 라이터는 롤러에 손을 대자 마자 햇빛 쬔 미이라처럼 부스러졌다. 나는 책상 서랍에서 친구가 선물해 준 듀퐁 라이터를 찾아 반들반들한 옆구리를 딸깍 눌렀다. 점화된 가스 불은 소형 토치 램프 정도가 아닌 로켓 같은 화력을 내뿜었다.
향초 세 개가 밝히는 빛 속에 마주 앉아 있어도 어둠을 꺼리는 엄마의 두려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근현대사의 희비극 속에서 수시로 B29의 출몰을 회상하던 시대적 공포 때문인지, 눈을 희번덕거리며 비상 사태를 포고하던 옛 정부의 제한된 삶 때문인지, 단지 생활의 불편함 때문인지.
한전에 전화했더니 이 부근 정전 건은 이미 여럿 접수되었다고 했다. 무념무상의 상태로 밖에 나왔다. 형광의 조명은 수프처럼 끼얹은 어둠 사이로 전신주 위에서 작업중인 남자들을 비추고 있었다. 도시의 삶은 복합적이다. 어떤 때는 사회적 진화를 보여주는 활기찬 실험실 같고, 다른 때는 기능을 잃어버린 채 경화된 거대한 기계처럼 보인다.
천만의 사람들이 욱여 넣어진 채 서로 떠밀고 같이 시달리는 시대에 부족한 한 가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사회의 강한 의무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동네 주민들이 그 밤에 모여 두런거리며 빛을 기다리는 광경은 우리 모두 어떤 식으로든 이어져 있다는 아늑한 감정을 주었다. 동일한 가치관과 동등한 자격을 지닌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감각. 과장하면 나는 더 이상 나이든 미숙아가 아니라 한 사람의 시민이 된 것 같았다. 최소한 아주 그렇게 이상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집에 들어오고 30분도 안 돼 불이 들어왔다. 엄마는 다시 찾아온 빛을 반기지 못하고 뭔가 기진맥진해져선 곧바로 잠드셨다. 마음은 질서 정연한 평온함을 찾았지만 자꾸 서성거려졌다. 머리 속은 어떤 대비로 나뉘어 있었다. 양초와 향초, 네온 불빛과 정전, 검약과 우쭐거림. 엄마의 그 시절에는 오렌지를 사먹거나 근사한 새 소파를 살 수 없었다. 휴일은 옵션이 아니었고 천운이 있어야만 해외 여행을 갈 수 있었다.
지금처럼 그때도 돈이 적다는 것은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았다. 극단적으로 실용적인 것을 선택하거나 아무 것도 고르지 않거나…는 아니었다 해도. 그 세대의 금욕주의에는 종교적인 요소가, 혹은 종교적 결핍에 대한 보상의 요소가 있는지도 몰랐다. 어느 일요일에 죄를 털어놓지 않는다면, 결혼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다면 기쁨을 주는 자제의 규율을 놓치리라는.
어렸을 때 엄마는 하늘색과 진청색 체크가 섞인 천을 끊어 IDR 재봉틀로 직접 내가 입을 셔츠를 만드셨다. 더 옛날에는 인장표 재봉틀로 할아버지의 목회용 마고자도 지으셨다. 또 작년 여름에는 집에서 입을 폴리에스테르 칠부 반바지를, 올 여름에는 삼베 조끼도 완성했다. 소매단과 깃이 없는 목에는 안 입는 당신 바지를 뜯어 테를 둘렀다. (엄마에게 재봉틀이 유일한 사치는 아니겠으나 얼마 전에는 준공업용 주끼 재봉틀을 선물했다. 야비한 속셈을 감추지도 않고. “파자마 만들어줘. 그럼 내년에도 후년에도 앞으로 쭉 입을게”) 어떤 때는 낡은 스웨터에서 실을 뽑아 푼 다음 그것들을 재배치해 셔츠를 만들기도 하셨다. 재활용은 엄마의 만트라였다. 그것이 행복한 단어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론적으론 공통의 개선을 위해 고안된 쾌활한 시민적 미덕 아닌가.
엄마는 이쑤시개 하나 쉽게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집에 우산이 스무 개, 양푼 그릇이 열 세 개, 벽돌이 열한 개, 프라이팬이 여덟 개, 커피잔이 서른 개가 되었다. 엄마는 늘 강조했다. “언젠가 필요할 날이 올 거야.” 그러나 나는 늘 “아니, 그런 날은 오지 않아”라고 대꾸하며 금욕을 소매했다. 내키는 건 모두 사들이면서 미래를 당겨 썼다. 모든 것이 그릇째 주어져 소중한 줄 몰랐다.
엄마의 정당성은 너무나 여러 번, 너무나 여러 방식으로 입증되었다. 그렇지만 어떤 면으론 무서웠다. 엄마가 집에 잡동사니가 너무 많다는 것을 인지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이 엄마를 먹어버릴 테니까. 사람은 불안을 느낄 때 수동적이 된다. 나는 수동성을 상쇄하기 위해 그 더미들 앞에 가서 “너희들. 이제 내가 끝장내겠어!”라고 엄포를 날리는 상상을 수 백 번도 더 했다.
평화로워 보이는 우리 집의 이면에는 혼돈이 숨어 있었다. 요즘 나의 후회는 우리 집을 지을 때 외부에 창고를 만든 것이었다. 그 안에는 엄마의 소중한 물건 예를 들어 아주 큰 대야, 큰 대야, 보통 크기 대야, 작은 대야들이 에일리언 알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다른 생활의 일습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창고는 길고양이들의 은신처, 대야는 새끼들의 요람이 되었다.
게다가 공원에서 온 생전 처음 보는 벌레들이 게임방처럼 드나드는 것도 고까웠다. 군화 뚫는 전방 모기가 한 수 접힐 공원 모기도 그랬지만, 체르노빌에서 왔는지 당구공만 한 귀뚜라미가 제일 무서웠다. 나는 벌레들의 호텔을 없애고 싶었다. 그 때마다 엄마의 첫 마디는 “그 안에 있는 것들 어디다 치울래?”였다. 나는 “방법을 찾으면 돼. 우리 집 주인은 그 대야들이 아니잖아”라고 항변했다. 그것들을 다 내쫓고 집의 통제권을 되찾으면 공간이 그만큼 더 생길 것이다.
그러나 다음 말은 나를 위축시켰다. “그게 다 할머니 때부터 살림하던 증거야!” 그 순간 창고 안에서 번식하며 무심히 무시되던 것들은 망각의 가장자리에서 낚아 채여선 신묘한 지위를 차지했다. 엄마가 감정적인 애착 때문에 그릇들과 시간을 더 보내며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다는 말은 고루할 뿐. 그것은 호경기 라이프 스타일의 부산물, 규모 있는 생활의 마지막 자취. 그러나 토템이 된 물건들은 오묘한 방식으로 엄마를 지치게 만들 것이다. 친구를 초대한 지 너무 오래 돼 그 멋진 도자기 세트가 부엌 수납장에 있는 것도 잊을 정도니까.
청빈함과 불확실함을 동일시하는 작위적 미학과 절대주의. 실망스럽고도 놀라운 세월. 진실만큼 초월적인 나날. 모든 사람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예전에 분포적이며 당연하던 것이 사치로 받아들여질 날이 올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자기 세대에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로마인보다 우울해져선 불안정하게 뒤척이며 질문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것이 세상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어느 순간엔 전부 그릇된 것 같고, 방향을 찾을 수도 없다. 그래도 나는 예전 삶의 단순함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어떤 삶이든 좋고 나쁜 순간이 있고 우리는 단지 좋은 순간을 기억하면 될 테니까. 누가 우물에서 건져주지 않아도 미래의 문제들로부터 살아남을 거니까.
그날 밤 나는 알았다. 그 순간은 다가온 어제의 세계,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는 것을.
(며칠 뒤 신발장에서 그때 미처 버리지 못했던 양초 하나를 발견했다. 나는 우리 집에서 가장 예쁜 종이에 싸서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얌전히 올려 두었다.)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