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삼성 등 내로라하는 대기업을 거친 뒤 직접 사업체를 운영했던 박남일(64)씨. 30여년 간 땅보다 배 갑판을 더 많이 밟아왔던 선장 출신의 이태성(64)씨. 평생 만날 일 없을 것 같은 동갑내기 두 사람이 함께 일을 시작한 건 지난해 봄 무렵이다. 은퇴 후 1년반쯤 쉬면서 여행 같은 취미생활이 신물나기 시작한 무렵, 꿈에 그리던 전원생활도 심드렁해질 무렵, ‘워라밸’을 맞추고 싶어도 워크가 없어 동창모임에서 할 말도 줄어들 그 무렵, 동네에 들어선 작은 공장이 박씨와 이씨 같은 ‘어르신’들을 줄줄이 채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장 이름은 ‘차모아’. 이름처럼 자동차코일매트부터 도어커버, 카시트까지 다양한 자동차 관련 제품을 생산하는 곳이다.
“출근 첫 날, 날아갈 거 같더라고요. 은퇴하고 ‘관리 안하는 삶’을 살다가 규칙적인 생활을 찾게 됐으니까요. 배 탔으니 제 자식들은 평생 아버지가 집에 오면 쉬고 먹고 자는 거 밖에 본 적이 없는데, 요즘 꼬박꼬박 출근하는 거 보면서 그렇게 신기해하데요”
정년 후 오랜만에 출근이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뜸 이태성씨의 말수가 많아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기승을 부린 최근 일터에서 만난 이씨는 시종일관 마스크를 꼭 쓴 채로 조심스레 대답했는데 ‘출근 첫 날'을 떠올리니 긴장이 풀린 듯했다.
애초 이씨가 꿈꾼 은퇴 후 ‘2막’은 지금과는 거리가 먼, “적게 쓰고 편하게 사는” 전원생활이었단다. 젊은 시절 이씨가 몰았던 배는 상선, 그 중에서도 화학선이었는데 한번 물건을 싣고 출항하면 반년간 땅을 밟지 못하고 오대양육대륙을 누비는 생활을 37년간 해왔던 터였다. 경기 포천시에 새 집까지 짓고 꿈에 부풀어 2막을 시작했건만, 돌아온 건 부부싸움이었다고. “한 1년 전원생활 하다보니까 가족하고 갈등이 생기는 거에요. 그전까지 수십년간 한두달 쉬다가 수개월씩 떠나고 다시 집에오면 한두달 쉬는 생활을 반복했는데 (은퇴하고) 집에 너무 붙어 있던거죠(웃음). 일이 없으니 무기력증도 생기고 건강도 악화되고 그래서 일자리를 찾았는데, 일반 직장 경험이 없으니 이것도 쉽지 않더라고요.”
마침 예전 동네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면접을 봤고, 한 직장에서 37년간 일한 끈기를 높이 사 최종 합격! 지난해 5월부터 출근을 시작했다.
박남일씨는 한달 후 같은 직장에 입사했다. 젊은 시절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에 근무했던 그는 직원 120명의 분사업체를 직접 경영하기도 했다. 10여년 전 관련 사업을 정리하고 한 외식 프랜차이즈업체 본부장으로도 근무해봤다. 본부장마저 그만두고 “진짜 은퇴”한 시기는 2016년 하반기. 박씨 역시 평소 마음먹었던 여행과 새 취미생활을 시작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2막’을 시작했건만 반년쯤 지나자 이태성씨처럼 무기력이 몰려왔다. “동창들이랑 만나도 일이 있던 예전하고 다르더라고요.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일자리센터를 알아보고 구직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도 했는데, 처음에는 쉽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1년 반만에 찾은 ‘진짜 2막’이 지금의 직장이다.
두 사람이 하는 일은 차종별 코일매트를 모양에 맞춰 절단하는 일이다. 얼핏 위험해보이지만, 코일매트가 일반 부직포보다 훨씬 두껍고 질겨 레이저로 잘라야 해 오히려 안전하단다. “젊은 팀장”들이 기록해둔 자동차 모델별 매트 사이즈를 컴퓨터에서 꺼내 기계에 입력하고 매트커버를 기기에 올려두고 뚜껑 닫고 기다리면 저절로 잘린다. 근무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점심시간을 제외한 8시간. 이 공장 면접임원들이 ‘어른신 직원’을 뽑을 때 1순위로 보는 ‘스펙’이 건강인 이유다.
두 사람이 꼽는 가장 좋은 점은 ‘어르신 친화’적인 근무 환경이다. 고령자가 상대적으로 많아 관련 근무 매뉴얼이 잘 갖춰져 있고, 20대 젊은 팀장-60대 나이든 팀원이 함께 일하니 모두가 존댓말을 써 저절로 ‘수평 조직’이 됐다. 90년대 생과 50년대 생 직원들이 많다보니 6시 퇴근 후에 ‘한잔’하며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일도 없다. 이태성 씨는 “예전 직장에서는 상명하복 문화가 강했는데, 여기는 그런 게 없다. 각자 맡은 일 하는 굉장히 자유로운 분위기”라며 “예전 직장에서는 같은 또래가 없었는데 지금은 같은 또래끼리 일하니, 휴게시간 10분 동안 각자 살아온 얘기만 들어도 재밌더라”고 말했다. 박씨는 “처음에 공장 나간다니 자식들이 걱정을 좀 했다. '제조업에 일한다니까 위험하지 않냐'고. 이제는 즐겁게 사는 거 같아서 좋다고 한다”고 했다.
인터뷰 자리에 함께한 박노철 차모아 전무는 “회사는 폭발적으로 성장하는데, 장기근속할 일손이 늘 부족했다. 여러 제도를 알아보다 생각한 방안이 ‘고령자 친화기업’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령자 친화기업은 고령 인력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채용하는 기업에 1억원에서 최대 3억원까지 사업비를 지원하고 교육과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정부 지원 제도다. 2018년 20명이었던 차모아 직원이 2년 만에 86명으로 늘었는데, 제조부분에 종사하는 26명이 60세 이상 ‘어르신’ 직원이다. 대다수가 쌍용자동차, 삼성중공업, GM대우 등 대기업에서 정년퇴직 후 재취업한 베이비부머 세대다. 박 전무는 “어르신 직원의 장점이 있다. 다들 직장생활 수십년 씩 해본 터라 업무 설명을 반복할 필요가 없고, 준비부터 청소 같은 마무리까지 시키지 않아도 본인 일이라는 걸 아신다. 무엇보다 안정적으로 인력수급이 가능해 신규사업에 투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이 회사는 올해에만 30명을 추가 채용했다.
은퇴 후 재취업에 대해 두 사람은 “자신감을 가지라”고 입을 모았다. 박씨는 “제 또래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원하는 거 같다”면서 “내가 할 수 있을까 싶어 주저할 때가 많은데, 어떤 일이든 직접 부딪쳐 보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이씨 역시 “평생 배만 탔던 제가 은퇴 후 제 2의 직업을 찾겠다고 생각하니 처음에는 막막했다”면서 “공공기관, 일자리센터를 찾으니까 의외로 괜찮은 소개를 받을 수 있더라”고 덧붙였다.
다만 눈높이는 낮추라고 귀띔했다. 박씨는 “처음에는 기계가공 같은 이전 직장과 연관된 일자리를 주로 찾았는데, 시간이 가니까 무리한 기대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전 직장, 직책의 연장선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건 힘든 만큼, 생각을 바꾸고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