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 갈등, 업무 저하 극복할까... 재택근무는 매일매일 실험중

입력
2020.09.2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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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택근무 6개월]  거스를 수 없는 흐름 된 재택근무


#. 워킹맘 A(39)씨는 지난 4월 재택근무에 들어간 이후 만성피로가 쌓여간다고 했다. 초등학생인 딸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숙제나 문제풀이를 도와달라는 부탁이 쇄도하고 있어서다. A씨는 "아이 공부를 봐주다 보니 밀린 업무 탓에 야근은 기본이 됐다"며 "다람쥐 쳇바퀴 돌 듯 24시간 육아와 업무가 반복되고 있다"고 푸념했다.

#. 대기업 계열 에너지 업체에서 팀장으로 근무 중인 B(37)씨는 요즘 재택근무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상사들의 잦은 호출로 인한 업무 능률 저하가 눈에 띄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B씨는 "사무실에 있을 때는 툭하면 회의 참석 요구를 받았는데 재택근무 이후엔 이런 일이 없어졌다"며 "아무래도 시간을 덜 빼앗기다 보니 업무 집중도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올 1월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국내 첫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3월 전후 많은 기업들이 일부 직무에 대해 본격적으로 재택근무를 도입했다. 그로부터 6개월, 이전에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같던 재택근무는 상당수 직장인들의 일상이 됐다. 재택근무가 외국계 회사나 일부 정보기술(IT) 기업의 전유물이던 시대는 막을 내린 것이다.

하루하루 벌이고 있는 초유의 실험에 직장인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일과 가정생활이 뒤섞이면서 업무 효율성은 떨어지고 스트레스만 가중되고 있다는 불만과, 사무실에서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환경에서 근무를 하다 보니 효율성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환호가 공존한다. 과연 코로나19가 종식 되더라도 재택근무는 하나의 주요한 근무 패턴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20일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에 따르면 매출액 상위 100대 기업 중 88.4%는 9월 현재 사무직 재택근무를 실시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재택근무에 대한 평가가 박하지 않다. 재택근무 생산성이 정상근무의 90% 이상이란 답이 절반(46.8%)에 육박했고, 응답기업의 53.2%는 '코로나19 위기 상황이 해소된 이후에도 재택근무를 활용할 것'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한꺼풀 벗겨보면 길어진 재택근무로 곳곳에 난 상처들이 적지 않다. 대기업 직원으로 아내와 함께 재택근무 중인 C(38)씨도 불편함을 호소한다. 집에 서재와 같은 별도 업무 공간이 없다 보니, 부부가 식탁에 마주 앉아 일을 하는데 종종 난처한 상황이 발생한다. 화상회의나 컨퍼런스콜(전화회의)이 열리면 나머지 한 명이 급히 자리를 비워줘야 한다. C씨는 "아내 화상회의와 내 전화회의가 겹쳐 화장실에서 통화한 적도 있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각종 피로감도 쌓이고 있다. '재택근무는 집에서 쉬는 것이란' 인식에서 비롯된 '재택감시'가 대표적이다. 중견기업 직원 D(40)씨는 얼마 전 재택근무 중 아이를 돌보느라 메신저 대답을 조금 늦게 했다가 팀장에게 싫은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D씨는 "결국 집에서 놀고 있지 않다는 걸 증명하라는 것 아니냐"며 "그 일 이후 메신저 알림 소리만 뜨면 가슴이 벌렁거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직장인 커뮤니티 등에는 '팀장이 10분에 한 번씩 자리에 앉아 있는지 체크한다' '부장이 부원들에게 매분 보고를 강요한다'는 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상사들에게도 고충은 있다. 직원 60여명 규모의 한 컨설팅기업 임원은 "평소 성실하고 일 잘했던 직원은 재택이나 출근이나 다를 게 없지만 문제는 소위 '뺀질이들'"이라며 "눈 앞에 보이지 않으니 업무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 문서만으론 도무지 파악이 어렵다"고 토로했다. 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주고 받는 대화 만으로 일에 대한 진척도 등을 일일이 캐묻는 것도 상사들에겐 곤혹스러운 부분이다.

기업 또한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재택근무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의 경우 근태관리, 평가기준 등이 명확치 않은 탓에 돌발 상황에 대한 대비가 부족한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택근무의 효과를 경험한 회사와 구성원들이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란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향후 재택근무가 일상적인 업무 방식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결국 재택근무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형태로 제도, 환경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주택금융공사 주택금융연구원은 지난 5월 발간된 '재택근무의 향상과 개선방안' 보고서에서 투명성을 바탕으로 한 결과중심의 성과시스템 확충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관리자의 명확한 업무지시, 직원의 구체적인 목표설정과 성과평가의 정비를 통해 상사와 부하직원 간 불신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택근무에 맞는 새로운 '룰'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한 스타트업 기업은 매일 오전 같은 시간에 화상으로 15분 간 스탠드업 미팅을 하며 서로의 고충을 공유하는 규칙을 만든 뒤 실제 생산성 향상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최지혜 연구원은 "재택근무가 코로나19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보편적인 제도로 정착하기 위해선 재택근무의 효과에 대한 논의와 개선을 위한 변화가 동반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윤태석 기자
임소형 기자
김기중 기자
김경준 기자
맹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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