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만 먹어요" "살고 싶지 않아요"…아이들이 보내는 위기의 '시그널'

입력
2020.09.21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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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복지사들이 말하는 돌봄공백의 현실
"부모가 술에 빠지면서 아이가 방치" 등
평범해 보이는 가정도 위기에 몰린 아이들 많아


“수급대상자도 아니고, 학부모는 사업체를 운영하는 평범한 가정이었어요. 그런 집에서도 아이들이 방치되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 놀랐죠.”

서울 A초등학교에서 취약가정 학생 등을 관리하는 교육복지사 박은혜(가명)씨. 지난 7월 초등 1, 2학년 남매를 '구조'하던 때를 떠올리며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등교 개학이 이뤄진 5월부터 6월 초까지만 하더라도 아이들은 학교에 빠지지 않았고 별문제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1학년 동생이 한글을 떼지 못했지만, 티가 날 정도로 같은 반 아이들에 비해 학력 수준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학부모는 긴급돌봄 교실도 신청하지 않았다. 평범한 남매는 애초부터 박씨의 관리대상 학생 100여명에 포함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상 신호가 감지된 것은 6월 중순부터였다. “아이들이 온라인 수업에 출석체크를 하지 않는 날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심상치 않다고 느낀 학교는 대책회의를 이어갔다. 알고 보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사업이 급격히 힘들어지면서 남매의 부모가 술에 의존하는 날이 길어졌고, 아이들을 방치한 상태였다.



교육뿐 아니라 생존 걱정해야 하는 공백

신종 코로나 사태 장기화로 힘든 상황에 처한 가정은 대부분 긴급돌봄 교실 신청 등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SOS’ 버튼을 누르는 가정을 겨냥해 적절한 복지의 사다리를 놓아주면 위기의 아이들을 구조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위험에 처한 가정의 신호는 때로는 미미하고, 이를 알아채는 현장의 손길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박씨와 같은 교육복지사들의 눈에 들어온 위기의 아이들은 많은 경우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부모로부터 방치되어 있으며, 교육뿐 아니라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돌봄공백에 처해 있기도 하다.

서울의 B중학교 교육복지사 김지현(가명)씨는 ‘코로나 블루(우울증)’가 가정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걱정된다고 말했다. “서울시가 지급하는 ‘식료품꾸러미’의 신청 안내 문자메시지를 어머니들께 보냈을 때, 36명 중 28명만 답장을 했어요. 과연 식료품꾸러미를 신청하지 않은 가정에서 아이들이 밥을 먹고 있을까. 답장조차 보낼 에너지가 없을 만큼 우울감이 심한 상태는 아닐까 걱정됩니다.”

김씨는 “부모가 우울증 증세를 보이면 아이들도 60% 정도는 우울감을 보이는데, 이 중 학교에 왔을 때 오히려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활발하게 지내는 아이들이 절반 정도다”라며 “하지만 원격수업으로 오래 집에 머물러야 하니 아이들의 상태가 체크되지 않고 본인의 에너지로만 버텨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경제적 취약계층도, 양육자의 부재도 아닌 평범한 가정의 아이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게 교육복지사들이 강조하는 큰 문제점이다. A 초등학교는 6월말~7월초 등교한 전교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생활 습관 파악에 나섰다. 이 학교 교육복지사 박씨는 “설문조사 결과 삶의 패턴이 무너진 아이들이 많았고, 심각한 경우 자해시도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5학년 여학생은 ‘현재 가장 고민이 되거나 어려운 일이 있다면’이란 질문에 ‘살고 싶지 않은 생각’이라고 썼다. 긴급면담을 통해 우울감 등으로 자해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아이는 평소 우울감과는 거리가 멀었고, 관리ㆍ지원 대상도 아니었어요. 가정의 어려움과 코로나 사태 장기화로 급우를 사귀지 못한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부족한 교육복지사… "코로나로 발길도 묶여"

가정의 위기로 긴급돌봄이 필요한 학생을 발굴하고 관리하는 교육복지사(지역사회교육전문가)는 전국 1,915명에 불과하다. 초등학교만 해도 6,200여개에 달해 이들이 과연 얼마나 돌봄 사각지대를 줄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최근 보호자 없이 라면을 끓여먹다 화재로 중태에 빠진 형제가 다니는 인천 모 초등학교에도 돌봄교실 운영 돌봄전담사만 있을 뿐, 교육복지사는 없었다.

신종 코로나 사태로 이들 교육복지사가 적극적으로 가정방문을 해 돌봄공백을 찾아내는 일도 더욱 힘들어졌다. 서울 신창초의 교육복지사 이새나씨는 “아이들을 직접 만날 때는 계절에 맞지 않는 옷, 줄어든 말수 등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지만 전화 통화로는 이런 비언어적인 시그널을 파악하기 힘들다”며 “학부모는 특히 아이가 잘 못 지내고 있다고 하면 본인이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느낄 수 있기에 가급적 '괜찮다'고 말한다”고 했다. 아이와 부모가 전화로는 쉽게 드러내기 어려운 가난과 돌봄공백은 오랜 시간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타나는데, 신종 코로나 사태 장기화는 신뢰관계를 형성할 기회 자체를 차단하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올해 처음으로 한 학교에 장기 근무한 서울시 교육복지사들의 순환 발령까지 이뤄졌다. 9년간 한 학교에서 근무하다 올해 3월 근무지가 바뀐 김씨는 “이전 지역에서 오랫동안 관리해 온 아이들이 ‘요즘 제대로 밥을 못 먹고 있다’, '1주일동안 라면만 먹었다'고 연락해 와 그 지역 지원단체를 연결해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각지대를 찾기 위해 학생이 원격수업을 2,3일 들어오지 않으면 반드시 전화해 아이와 직접 통화해 달라고 담임교사에 안내하지만, 복지사와 아이들이 만나지 못하면서 연결고리가 끊어진 사이 변화를 잡아내기 힘들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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