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을 보며 마키아벨리와 로베스피에르를 생각한다

입력
2020.09.21 04:40
23면
<7>전남 강진 다산초당

편집자주

진보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며 역사적 장소와 현재적 의미를 찾아보는 ‘한국근대현대사 기행’을 매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한다.



나는 제주를 떠나 호남을 돌고 있다. 그 첫 행선지는 다산 정약용이 유배를 와 있던 강진이다. 강진의 다산초당은 한국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다. 남해가 내려다보이는 초당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소나무 뿌리들이 땅위로 얼키설키 나와 있는 길을 지나가야 한다. 이 길을 갈 때마다 감동을 느끼고, 정호승이 이곳을 오르며 왜 ‘뿌리의 길’이란 시를 썼는지 이해하게 된다.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중략)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하략)



나는 이 길이 ‘민중’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민중은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묵묵히 일하여 사회를 유지시켜 주는 뿌리다. 그리고 ‘뿌리의 길’이 보여주고 있고 정호승이 잘 노래했듯이,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 민중봉기가 그런 것이다. 가파른 길을 올라 언제나처럼 초당 뒤편에 있는 정자로 달려가 다산이 매일 유배의 울분을 삭히며 바라봤던 남해바다를 내려다보며 그에 대해 생각해 봤다.

다산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개혁군주’ 정조의 오른팔이었다. 그는 정조의 지시에 따라 수원에 계획도시 화성을 지으며 돌을 들어 올리는 거중기를 만들고 정조의 화성방문을 위해 한강에 배들을 연결해 다리를 놓았다. 한마디로, 그는 의학, 공학, 형법, 정치학, 문예 등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인적 지식인’,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다.



그러나 그의 매형이 최초의 영세자이자 순교자인 이승훈이었고, 청나라 교구에 천주교를 박해하는 조선으로 쳐들어와달라는 백서를 쓴 황사영이 조카사위였고, 형제들도 천주교도였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다산은 천주교를 버리고 가족들을 고발했다. 형 약종은 순교했고 자신과 약전은 살아남았지만 정조가 죽자 귀향길에 오르게 된다.

강진에는 외갓집인 해남 윤씨 집안이 있었다. 윤선도가 6대 외조부여서 처음에는 읍내 주막집에 머물다가 외갓집에서 자신들의 땅인 이 산에 초당을 지어줬고 많은 책들을 산꼭대기로 가져다줬는데, 이 산에 차가 많이 자라 그는 호를 다산으로 삼았다. 다산은 문중에서 올려 보낸 똑똑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같이 책을 쓰며 살았다. 18년간의 유배기간동안 그는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600권을 썼다. 일종의 ‘집단지성’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다산의 저서들을 다산의 외갓집인 윤씨네 집안에 빚지고 있는 셈이다. 다산은 40세에서 57세까지 인생의 황금기를 이 오지의 산속에서 보냈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그는 역사에 남을 책들을 후세에 남겼다. 만일 그가 유배를 오지 않았다면, 그는 일개 관료로 역사 속에 사라졌을 것이다. 유배는 엄청난 고통이었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불행을 가장한 축복’이었다.

다산초당을 보고 있자, 갑자기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정약용보다 300년 전에 살다간 '군주론'의 저자 니콜로 마키아벨리다. 다산이 정조 시절 잘 나갔듯이, 그 역시 르네상스시절 이탈리아의 중심지였던 피렌체에서 메디치가가 쫓겨난 뒤 민주정부의 관리로 잘 나갔다. 하지만 메디치가가 복귀하자 유배를 당해, 다산과 비슷한 나이(42~57세)에 비슷한 기간(15년)을, 비슷한 유배의 고독 속에, 책을 쓰며 살았고, 그 덕으로 '군주론'이란 대작을 남겼다.


마키아벨리는 중세가 깨어지고 국민국가의 시대가 오고 있지만 작은 도시국가들이 싸움질이나 하고 있는 이탈리아를 보며 통일된 이탈리아라는 국민국가의 건립을 주도할 ‘새로운 군주’를 주장했다. 다산이 책을 쓰던 시기는 마키아벨리 시대가 아니고 프랑스혁명에 의해 만인이 평등하다는 자유·평등사상이 등장한 19세기 초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고 민생이 나락에 빠지던 시기이다. 지배계급인 양반 관료들은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착취할 것에만 관심이 있고, 관념적 성리학에 빠져있었다. 이들과 달리, 다산은 백성의 실생활을 개선시키려는 실학파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었다. 그는 넓은 의미의 ‘근대’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실학파를 비롯한 조선의 지식인들에 의한 위로부터의 ‘내부개혁’이 갖는 한계를 보여준다.



“다 같은 백성인데 누구는 토지의 이로움을 남들 것까지 가져서 부유한 생활을 하고 누구는 토지의 혜택을 받지 못하여 가난하게 살 것인가, 그래서 토지를 개량하고 백성에게 골고루 나눠주어 그 질서를 바로잡아주는 것 바로 정(政)이다.”

정치의 역할에 대한 다산의 주장은 ‘혁명적’이다. 그는 땅을 일구는 농민만이 농지를 가져야 한다는 ‘경자유전’의 원칙을 주장했다. 그는 단순히 토지의 봉건적 소유를 부정했을 뿐 아니라 ‘공동소유, 공동생산’이라는 토지의 ‘사회적 소유’와 ‘사회주의의 분배논리’인 노동량에 따른 분배를 주장했다. 이 점에서 북한은 한 때 그를 ‘조선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농지개혁에 대한 그의 생각이 급진적이라면, 정치 등은 그렇지 않다. 한 때 그는 왕도 백성들의 대표가 뽑아야 한다는 급진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 ‘지적 외도’였고, 그의 초점은 세도정치를 바로 잡는 ‘관료제의 개혁’에 놓여 있었고, 정조 같은 계몽군주를 통해 제대로 된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것이었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자는 왕권강화론자였다. ‘목민(牧民)’, ‘애민(愛民)’ 등이 보여주듯이 그의 생각은 관료들이 정직하고 검소하며 ‘국민을 위한 정치’를 펴야 한다는 것이었지, 국민 스스로 주인이 되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정치’는 결코 아니었다. 전근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신분제에 대해서도, 그는 신분제의 불평등이 필요하다고 봤다. 사·농·공·상 등의 사회적 분업은 바람직하며, 나라가 움직이려면 ‘양반의 지도와 통솔이 필요하다’고 본 엘리트주의자였다.



왜 그는 같은 시대에 살았던 프랑스혁명의 로베스피에르 등과 같이 ‘신분제 타파’라는 생각을 못한 것인가.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서 생활할 권리를 갖는다”는 프랑스 인권선언이 선포된 것이 다산이 유배를 가기 10년 전의 일이다. 아니 멀리 유럽까지 갈 필요가 없다. 이 땅에서도 다산이 유배를 가기 600년 전인 1178년 고려의 관노였던 만적이 “왕후장상의 씨가 어디 따로 있느냐”고 신분제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었다. 다산에게 자유평등의 근대적 사상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것인가.

그는 왜 서양의 책을 보고 거중기를 만드는 등 서양의 ‘선진공학’은 받아들이면서, 자유, 평등, 신분제 타파와 같은 서양의 ‘선진사회사상’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인가. 당시 유럽의 공학책과는 달리 선진사회사상 책은 청나라에 번역되지 않았던 것인가. 아니면 정조가 가지고 있었지만 다산에게 공학책만 주고 ‘불온한’ 선진 사회사상 책은 주지 않은 것인가. 그 이유가 무엇이든, 정약용 등 실학의 한계가 우리가 서구와 달리 자생적인 근대화에 실패하고 서구 식민주의의 먹이가 된 원인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다산이 다산초당이 아니라 처음 머물렀던 저잣거리의 주막집 ‘사의재(四宜齋)’ 같은 곳에 더 머물러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다산초당에서 속세로부터 고립되어 집필에 집중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곳은 자신의 ‘고립된 왕국’으로, 민초들의 삶과 한숨, 신음으로부터 너무 떨어져 있었다. 사물을 정확히 보려면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지만, 그는 현실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다산 서당을 내려와 사의재 앞에 서자, 최근 소위 ‘진보진영’의 일련의 일탈과 관련해, 다산이 자신의 숙소를 사의재라고 부르면서 세운 네 가지 행동지침이 가슴에 다가왔다. 역시 다산사상의 진수는 관료와 지도층이 갖추어야 할 덕목에 있다. “생각은 맑게, 용모는 단정하게, 말은 과묵하게, 행동은 신중하게.”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