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 독감 무료 예방접종?…백신업계 "이미 늦었다"

입력
2020.09.17 13:52
2면
올해 공급량 이미 생산 끝나 시장에 풀려
백신 추가 생산에 통상 6개월, 빨라야 3개월
백신업계 "생산 구조 모르는 터무니 없는 얘기"


"지금 백신 생산 들어가도 빨라야 내년 초에 나올 텐데, 그땐 독감 유행 끝나죠. 어차피 폐기될 걸 생산하란 말입니까?"

정치권에서 나온 전 국민 무료 독감 백신 예방접종에 대한 백신업계의 반응은 일관됐다. 백신 생산 시스템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터무니 없는 얘기란 게 백신업계의 공통된 평가다. 일반적으로 백신 생산에 필요한 시간은 3~6개월. 지금 당장 생산에 들어간다 해도 시중에 유통되는 시점은 내년으로 넘어갈 수 밖에 없다. 더구나 백신 제조사들의 올해 예방접종 물량 생산은 이미 끝난 상태다. 업계에 대한 이해도나 의견 청취도 생략한 비현실적 주장이란 비판이 거센 이유다.

17일 백신업계에 따르면 녹십자, SK바이오사이언스 등 독감 백신 제조사들은 지난달 백신 생산을 마치고 이달부터 유통에 들어갔다. 올해 각 제조사들의 생산능력과 수요 예측에 기반해 생산된 총 백신 물량은 지난해보다 20% 증가한 약 3,000만명분이다. 이중 무료 접종 대상자인 만 18세 미만 소아ㆍ청소년, 임신부, 만 62세 이상 노인 등이 1,900만명이고, 1,100만명은 보건소, 병원 등에서 유료로 맞으면 된다. 전 국민 접종을 위해선 2,000만명분 이상 물량이 더 필요한 셈이다.

하지만 백신 생산은 매년 초에 준비를 시작해야 접종 시기를 맞출 수 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올해 유행할 것으로 예상되는 독감 바이러스 균주를 연초에 발표하면 백신 제조사들은 유정란 배양 또는 세포 배양으로 3월께 백신 생산에 착수한다. 유정란 배양은 프랑스에서 병아리를 수입해 멸균시설에서 키워 이들이 낳은 유정란을 확보한 뒤, 여기에 균주를 이식해 면역체계가 잡히도록 환경을 조성하며 백신을 만드는 방식이다. 생산과 제조, 식품의약품안전처의 국가출하승인을 거치기까지 6개월 정도 걸린다. 전 세계적으로 제조사들 중 98%가 유정란 배양 방식을 쓴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세포 배양은 세포 자체로 백신을 배양하는데 최소 3,4개월은 걸린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국내 제조사들 중에선 SK바이오사이언스만 세포 배양 방식을 쓰고 있다.

결국 당장 추가 생산에 돌입해도 일러야 내년 초에 추가 백신을 공급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미 해당 백신으로 대응할 수 있는 독감은 유행이 끝난 뒤다. 백신업계 관계자는 "독감이 유행하는 시기를 1,2주 앞둔 시점에 접종해야 면역력이 확보되기 때문에 이달 초부터 접종이 시작된 것"이라며 "내년 초엔 이미 독감이 휩쓸고 지나간 뒤인 데다, 매년 유행할 독감은 바뀌어서 지금 생산을 시작하라는 건 버려질 백신을 만들라는 말"이라고 꼬집었다.

GSK, 사노피 등 외국 제약사로부터 추가로 수입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재고가 남아야 받을 수 있는데, 전 세계적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독감이 겹치는 '트윈데믹(비슷한 2개 질병이 동시에 유행하는 상황)'을 대비하고 있어 이미 독감 백신 수요가 급증한 상태다. 제약사 관계자는 "코로나19와 독감 증상이 비슷한데 코로나19는 격리, 진단 등에 시간이 걸리는 반면, 독감은 예방이 가능하니 세계 곳곳의 방역 당국이 예방접종을 맞으라고 권고하면서 방역 혼란을 최소화하려고 하고 있다"며 "제조사별로 각자 생산능력에 맞게 물량을 맞췄고 재고가 있다고 해도 자국민 우선이기에 한국으로 수출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방역 당국은 추가 물량이 불가능할뿐 아니라 불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박능후 보건복지부장관은 이날 보건복지위원회 회의에서 "전 세계에 국민의 절반 이상 독감 백신을 접종한 나라가 없는데 현재 우리는 60%까지 접종할 수 있는 물량이 확보돼 있다"며 "오히려 과도하게 비축한 수준"이라고 밝혔다. 이어 "과도하면 폐기 물량이 발생하는 등 비효율을 낳는다"며 "의학적으로든, 수치적으로든 논쟁할 필요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유료로 풀리는 백신 물량을 무료로 전환하는 것도 어려운 형편이다. 백신업계 관계자는 "1,100만병을 무료로 돌리면 해당 물량을 공급할 대상 우선순위는 어떻게 정할 건지 논의도 아예 안된 걸로 안다"며 "보건 당국도, 전문가들도 전 국민 무료 접종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인데 정치권만 무작정 우기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맹하경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