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사의 표명에 따라 14일 치러진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정권 2인자'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이 선출된 것은 변화보다 안정을 택한 결과다. 아베 총리의 계승을 내세운 그를 구원투수로 내세운 건 당면 과제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수습과 경기 회복에 매진하겠다는 것이다. "아베 정권은 끝났지만 아베 정치는 끝나지 않았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이 때문에 스가 정권에서도 당분간 한일관계 개선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스가 신임 총재는 이날 당선 소감에서 "코로나19 국난 상황에서 정치 공백은 용납되지 않는다"면서 "나에게는 아베 정권의 노력을 계승하고 전진시킬 사명이 있다"고 강조했다. 아베 총리는 이에 앞서 "이 사람이라면 틀림 없다"면서 "레이와(令和) 시대에 가장 적합한 자민당의 새 총재가 아니겠느냐"고 치켜세웠다.
스가 총재는 출사표를 던진 직후부터 아베 노선 계승을 강조했다. 그는 지난 8일 소견발표 당시 개헌에 대해 "자민당 창당 이래 일관된 기본 방침"이라며 "확실히 도전하겠다"고 밝혔다. 아베 총리의 개헌 의지를 잇겠다는 것이다. 다만 아베 총리가 '2020년 개헌'이라고 공언했던 것과 달리 목표 시점을 밝히지는 않았다.
아베 정권의 간판 정책인 아베노믹스의 골격도 그대로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코로나19에 따른 기업의 고용 유지를 위해 재정을 신속하게 집행하겠다는 뜻과 함께 "필요하면 금융정책을 한층 강력히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반면 미중 대립 등 불안한 국제 정세 속에 검증되지 않은 외교능력은 약점으로 꼽힌다. 그는 일단 미일동맹을 축으로 한 아베 총리의 외교정책 기조를 유지할 방침이다.
스가 총재는 그간 아베 정부의 대변인으로서 한일 현안에 강경한 목소리를 내왔다. 강제동원 배상문제와 관련해선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으며 한국 대법원 판결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는 입장이다. 또 일본 기업의 자산 매각과 관련해선 "모든 선택지를 두고 의연하게 대응하겠다"며 추가 보복을 시사했다.
스가 총재는 최근 월간지 '분게이슌주'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이 정도로 빨리 한일관계가 이상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며 "어느 쪽이 골대를 옮기고 있는지를 '증인'인 미국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이 한일관계 악화의 원인 제공자라는 아베 정부의 인식 그대로다.
우파 이데올로기 색채가 뚜렷했던 아베 총리와 달리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유연함을 보일 것이란 평가도 있다. 그는 아베 총리가 2013년 12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할 당시 "경제 재생이 우선"이라며 만류한 적이 있다. 일각에서 "우파 이데올로기 실현을 최우선으로 할 지는 의문"(나카지마 다케시(中島岳志) 도쿄공업대 교수)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당 안팎의 관심은 15일 당직 인사와 16일 개각에 집중되고 있다. 당내 5개 주요 파벌이 압도적 지지를 몰아준 것은 향후 인사를 의식한 보험과 같다. 이에 간사장 등 당 4역과 새 내각에서 주요 직책을 둘러싼 파벌 간 주도권 경쟁이 격화할 수 있다.
'스가 대세론'의 물꼬를 튼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간사장은 유임이 확정됐다. 간사장을 포함한 당 4역에 자신을 지지한 호소다파ㆍ아소파ㆍ다케시타파 인사를 고루 기용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각 파벌들은 정권 2인자인 관방장관 등에도 눈독을 들이며 논공행상을 기대하고 있다. 스가 총재는 "개혁에 의욕이 있는 사람을 우선하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전폭적인 지지를 몰아준 파벌의 요구를 외면할 경우 임기 초부터 구심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에 스가 총재가 차기 총리에 취임한 뒤 국정운영의 구심력과 정권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중의원을 해산해 조기 총선을 실시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아베 총리의 사의 표명 후 내각과 자민당 지지율이 급등했고 최근 통합한 야당이 전열을 정비하려면 시간이 걸리는 만큼 선거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돼 있다는 점에서다. 10월 말~11월 조기 총선을 통해 명실상부한 '스가 시대'를 열어가려 할 것이란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