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안이 어두워지자 어디선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 고양이들이 객석을 내달려 무대 위에 모인다. 몸놀림이 어찌나 가볍고 날쌘지, 진짜 고양이 같다. 맹랑한 몇몇 녀석은 어둠 속 관객을 향해 신비스러운 초록색 눈을 번쩍거리는데,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면 불빛에 살짝 비친 ‘고양이 마스크’를 볼 수도 있다.
코로나19 시대엔 고양이도 마스크를 쓴다. 지난 9일 서울 잠실동 샤롯데시어터에서 개막한 뮤지컬 ‘캣츠’ 내한 공연에 마스크가 소품으로 등장한다. ‘캣츠’ 40년 역사상 유례 없는 일이다. 고양이 분장과 똑같이 디자인한 ‘메이크업 마스크’라서 언뜻 보면 마스크인지 전혀 모를 정도로 감쪽같다.
고양이 무리가 객석을 통과하는 오프닝 장면, 선지자 고양이 올드 듀터러노미가 축제 무대에 오르는 장면, 악당 고양이 맥캐버티가 갑자기 출몰하는 장면 등 극 흐름상 객석 활용이 불가피한 장면에서 배우들이 마스크를 착용한다. 관객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면서 고유의 재미를 놓치지 않은 연출이다.
마스크 디자인은 분장 슈퍼바이저 카렌 도슨이 맡았다. 오리지널 프로덕션의 분장과 의상, 무대 디자인을 총괄한 세계적인 무대 디자이너 존 내피어,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 등 원작자들과 협의해 완성한 마스크다.
고양이도 이렇게 방역에 앞장서는데 사람이 가만히 있을 순 없다. 명당 중의 명당인 1열 좌석은 ‘거리두기’를 위해 비워 둔다. 관객들은 마스크 착용, 한 칸 띄워 앉기, 문진표 작성을 반드시 해야 한다. ‘캣츠’는 이러한 수고와 불편을 기꺼이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코로나19 시대라서 더 그렇다.
시인 T. S. 엘리엇의 우화집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가 원작인 ‘캣츠’는 익히 알려진 대로 뚜렷한 서사가 없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고양이들의 축제 ‘젤리클 볼’에 참가한 고양이들의 자기소개와 장기자랑으로 채워진다. 그런데 이 장기자랑이 관객의 혼을 쏙 빼놓는다. 웨버의 감미로운 음악, 발레와 아크로바틱, 재즈댄스, 탭댄스를 넘나드는 흥겨운 군무 덕분이다.
고양이들은 인간을 꼭 닮았다. 게으르지만 인심 좋은 중년 고양이, 치명적인 매력으로 객석을 휘어잡는 반항아 고양이, 재기 넘치는 도둑 고양이 커플, 도드라지지 않아도 꼭 필요한 감초 같은 사회자 고양이, 신출귀몰하는 마법사 고양이 등 제각각 개성이 넘친다. 중풍으로 손을 떨면서 화려했던 젊은 시절을 추억하는 극장 고양이에게선 인생의 비애가 느껴진다. 그래서 관객들은 심리 상태, 고민, 나이에 따라 저마다 ‘최애’ 캐릭터를 다르게 꼽는다.
이 고양이들은 선지자 고양이 올드 듀터러노미를 중심으로 조화롭게 어울린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유령 역으로 국내 팬들에게 인기 높은 브로드웨이 스타 브래드 리틀이 올드 듀터러노미를 연기한다.
‘캣츠’ 하면 빼 놓을 수 없는 노래, ‘캣츠’를 못 본 사람도 흥얼거릴 수 있는 선율, 바로 ‘메모리’다. 한때 아름다운 고양이였으나 이제는 홀로 초라하게 늙어 가는 그리자벨라가 부르는 곡이다.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코로나19 시대의 갑갑함 때문일까. 희미해진 추억을 읊조리다 다시금 희망을 부르짖는 애절한 곡조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새벽이 오면, 오늘밤도 추억이 되겠지. 그리고 새로운 날이 시작될 거야(When the dawn comes tonight will be a memory too. And a new day will begin).” 40년 전 쓰인 노랫말이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건넨다. 객석에선 마스크 너머 훌쩍이는 소리가 잔잔하게 퍼져 나간다. 그렇게 ‘캣츠’는 시대를 뛰어넘어 새 생명을 얻는다.
웨버는 SNS를 통해 개막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캣츠’ 오리지널 프로덕션을 공연 중인 나라는 현재 한국뿐이다. 배우들도 개막 직전 무대 뒤에서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를 응원했다. 그 소리는 객석까지 들렸다. 코로나19 시대에 공연을 한다는 건, 그 자체로 희망이자 기적이다. 11월 8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