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사회인 일본에서 벌어지는 ‘개호(介護ㆍ간병) 살인’은 한국에서도 이미 벌어지고 있다. 사회복지 시스템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치매환자와 가족이 겪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최근 장편소설 ‘코스모스를 죽였다’(문학의문학)를 펴낸 윤희일 경향신문 선임기자는 11일 전화통화에서 “교환일기 형식을 차용한 이 소설에 나오는 에피소드는 팩션”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팩션은 팩트(factㆍ사실)와 픽션(fictionㆍ허구)의 합성어다.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작가가 상상력을 더했다는 얘기다.
그는 2014년부터 3년간 도쿄특파원으로 일했고, 2017년부터는 국내에서 치매로 인한 간병살인 사례를 모았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 싶다며 치매 걸린 아내가 남편에게 교환일기를 쓰자고 하고, 아내의 첫 사랑이었던 선생님을 찾는 길에 남편(아내는 아들로 인식)이 함께 하는 에피소드는 6년간 해온 취재에 바탕을 뒀다. 윤 기자는 “치매환자는 단기기억부터 잃어버려 옛 친구나 첫 사랑을 찾는 경우가 많고, 남편을 아들로 보거나 거울에 비친 본인을 타인으로 알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소설 속 치매환자인 아내는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남편에게 죽여 달라고 요청한다. 아들이 보험금을 탈 수 있게 동반자살을 사고로 위장하려는 남편은 캠핑카를 끌고 호수를 향해 뛰어든다. 그러나 낭떠러지 중간의 나무에 걸려 남편만 생을 이어가게 된다. 살인죄로 교도소에 복역중인 남편이 ‘대답없는 교환일기’를 쓰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윤 기자는 “관광버스 단체여행을 가다 사고로 노인 관광객이 사망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살아남은 다른 노인이 ‘즐겁게 여행 가다가 목숨을 잃었는데 자식에게 보상금까지 나온다니 이렇게 행복한 죽음이 어디 있냐’고 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며 “자식에게 무언가라도 주고 떠나고 싶은 부모의 마음, 거역할 수 없는 병에 걸린 사랑하는 사람과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그려내고자 했다”고 말했다. 처음엔 수사기록으로 구상했지만 “하루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감정을 가장 충실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생각에 교환일기 형식으로 바꿨다.
‘팩션’답게 소설 속엔 치매환자를 돌보는 유용한 ‘디테일’도 담겼다. 화장실을 못가는 아내를 위해 자동차와 방에 요강을 놓는다거나, 복용할 약을 날짜에 붙여놓는 약 달력 등이다. 그는 “예전엔 일본의 5~10년 뒤가 한국이라고 했지만 사회발전단계가 비슷해진 지금은 차이가 없다”며 “빈곤층으로 전락한 노인이 벌이는 범죄, 빈집 문제, 간병살인은 일본만의 문제로 보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치매환자와 가족이 겪는 ‘기나긴 고통’에 대해 윤 기자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갑작스레 죽음을 맞는 교통사고나 다른 질병과 달리, 치매는 비교적 오랫동안 헤어짐을 준비할 수 있다”며 “더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그래서 더 행복한 질병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전작 ‘십년 후에 죽기로 결심한 아빠에게’에 이어 이번에도 죽음을 다룬 작가는 “다음에는 행복한 죽음을 찾아가는 웰 다잉(Well-dying)을 다뤄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에서 30년간 기자생활을 하며 한국기자상 등을 수상한 그의 전작은 6개국에 번역ㆍ출판됐으며, 2017년 중국 교사와 전문가가 선정한 ‘올해의 영향력 있는 책 100권’에 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