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할 때까지 와인을 마셔라 ...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와인 플렉스'

입력
2020.09.12 04:30
16면

편집자주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고대 이집트 벽화 가운데 ‘네바문의 정원’이란 그림이 있다. 기원전 14세기 무렵에 그려진 것으로 테베의 서기이자 공물 징수관이었던 네바문이라는 귀족의 무덤에서 발견된 그림이다. 이 그림은 마치 입체파인 듯한 이집트 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닌 “각 요소들의 특징이 완전하게 표현될 수 있는 최적화된 각도에서”(곰브리치 서양미술사) 그려졌다고 한다.

필자는 이집트의 정원에 심어진 나무가 궁금한 나머지 이 작품을 눈여겨볼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 특권층은 대부분 정원과 포도밭을 소유했다. 정원수의 반 이상이 포도나무였는데, 규모가 큰 포도밭은 따로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네바문의 정원’에는 포도나무가 없었다.



그러던 중 여러 사료를 토대로 그린 고대 이집트의 정원 재현도를 접했다. 장방형 모양을 한 정원은 높은 담을 둘렀다. 담 안쪽을 따라 나무들이 둘러섰고, 배수로가 연결된 여러 개의 연못에는 물고기와 오리가 노닐었다. 연못 옆에는 정자도 있었다. 정원 가운데에는 포도밭이 자리했다.

그림을 보고 있자니, 문득 포석정이 떠올랐다. 평민은 넘볼 생각도 할 수 없는 곳. 이집트 귀족은 담장 안쪽에서 정자에 앉아 포도를 먹으며 와인을 마셨겠다. 이생의 부와 특권이 내세에서도 영속하기를 빌면서 말이다.

한데 이전 칼럼에서도 언급했지만, 고대 이집트는 초기엔 와인을 생산하지 못했다. 전량 수입해 왔다. 기원전 3150년 무렵에 만든 스코르피온 1세의 무덤에서 발굴된 와인 항아리가 이를 증명한다. 고고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항아리의 재료는 이집트가 아닌 당시 가나안 지역(현재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이 자리한 지역)의 찰흙과 유사했다. 항아리 속 성분은 이란에 있는 자그로스 산맥의 고딘테페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한 침전물과 수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먼 외국에서 들여온 터라 와인은 값도 비쌌을 뿐더러 희귀한 음료였다. 이런 음료는 오직 신을 위해 바쳐졌고, 신과 동격인 절대자 파라오만이 즐길 수 있었다. 파라오가 죽으면 내세에서도 와인을 마실 수 있도록 미라와 함께 무덤에 부장품으로 묻었다. 예의 스코르피온 1세의 무덤에서는 무려 700여개의 와인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양으로 치면 4,500ℓ나 된다.



그런데 기원전 3000년 무렵부터 이집트는 곧바로 와인 생산국이 된다. 불과 100~200여년 만에 와인 수입국이 와인 생산국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와인의 매력에 흠뻑 빠진 이집트인들은 당시 와인 교역이 활발했던 가나안 사람들을 통해 포도나무 묘목을 들여왔고, 농업 전문가를 초빙하거나 때로는 납치까지 해서 포도나무 재배 기술을 익혔다.

이집트의 자연 조건을 살펴보면, 그들이 포도나무 재배와 와인 양조 기술까지 습득한 것은 가히 놀랍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이집트는 전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이다. 그러다 보니 예로부터 나일 강 삼각주 일대와 일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주로 밀과 보리를 재배했다. 포도나무를 재배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기후와 토양이 맞지 않으니, 예의 이집트 정원 그림에서처럼 포도나무를 기르려면 물을 끌어와야 했다. 당연하게도 포도밭 관리와 와인 양조는 고비용 산업이 될 수밖에 없었고, 정원이나 포도밭은 왕실이나 상류층의 전유물이 되었다.

한편, 이집트인들은 내세를 굳게 믿었다. 그들은 태양신만큼이나 내세를 다스리는 신 오시리스를 숭배했다. 겨울에는 죽은 듯한 포도나무가 봄이 되면 다시 싹을 틔우듯, 오시리스가 부활을 선물해 주리라 믿었다. 오시리스는 포도나무와 포도주, 부활의 신이었다. 또한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신이기도 했다. 이집트인들이 망자의 부활을 기원하며 다섯 개 지방에서 생산한 최고급 와인을 무덤 부장품으로 넣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후대의 신왕조 시대엔 포도밭을 곳곳에 만들고 와인을 신에게 바치는 일이 파라오의 종교적 의무로 여겨지기도 했으니, 이집트에서 와인은 종교적 의미가 무척 강했다.

아무튼 이집트인들은 와인을 자체 생산하게 되자, 파라오뿐만 아니라 사제나 서기와 같은 상류층까지도 와인을 향유했다. 피라미드도 처음에는 파라오만을 위해 건설했지만, 나중에는 상류층들도 자신들의 내세를 위해 피라미드를 지었듯 말이다.

특권층만 누릴 수 있었던 와인과 피라미드. 재미있게도 피라미드를 만드는 일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노예가 담당한 게 아니었다. 자유민인 평민 계층이 그 일을 맡았다. 이들은 맥주와 빵을 급여로 받고 특권층을 위해 일했다. 하지만 평민들에게 피라미드가 그렇듯 와인은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귀하고 비싼 음료였다. 명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정작 명품을 소유할 수 없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얼마 전 과학기술의 첨단에 있는 일론 머스크가 피라미드를 외계인이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피라미드 건설 방법이 이 정도로 오리무중인 가운데, 필자는 그 척박한 땅에 어떻게 포도나무를 재배했는지가 정말로 궁금했다. 다행스럽게도 이 불가사의한 ‘외계인’들은 포도나무 재배법과 와인에 대해서도 기록을 제법 세세하게 남겼다. 이 기록들을 통해 당시 이집트의 포도밭 규모와 와인 생산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기원전 2550년에 사카라(Saqqara)의 한 고위 관리는 자신의 포도밭을 이렇게 묘사했다. “길이 200큐빗, 폭 200큐빗(지금의 9,917㎡) … 엄청나게 많은 나무와 포도나무가 늘어서 있고, 많은 양의 와인을 빚었다.”



기원전 1400년대에 그려진 나크트 석묘의 벽화에는 포도나무 재배법과 와인 양조법이 담겼다. 놀랍게도, 벽화는 당시 포도나무 재배법과 양조법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포도넝쿨이 아치형 덩굴시렁을 타고 올라가 포도가 아래를 향해 열리도록 퍼걸러 방식으로 관리하고 수확하기 편한 높이로 재배한다. 손으로 수확한 포도는 바구니에 담아 옮긴 뒤 일일이 알맹이만 따서 커다란 통에 넣는다. 남자 4~6명이 커다란 통에 담긴 포도를 발로 밟아 즙을 낸다. 즙을 내는 동안 남자들은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나무에 묶어 늘어뜨린 긴 줄을 잡는다. 남자들이 일하는 동안 여자 여럿이 리듬에 맞춰 노동요를 부른다. 포도즙을 통으로 흘려 넣은 뒤, 포도껍질을 자루에 담아 막대기로 비틀어 마지막까지 짜낸다.

발효가 끝나면 와인을 커다란 점토 항아리(암포라)에 넣고 토기 마개로 항아리 입구를 막는다. 그 위에 다시 나일 강의 점토를 원뿔 모양으로 덧발라 밀폐한다. 이때 항아리 윗부분에 구멍을 뚫어 이산화탄소가 빠지도록 한다. 혹여 가스가 차 항아리가 깨지거나 폭발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이 과정이 끝나면 산화 방지를 위해 다시 구멍을 막는다.

마지막으로 할 일이 하나 남았다. 와인 항아리에 점토 인장을 찍는 일이다. 점토 인장에 포도밭과 와인을 만든 사람의 이름, 양조 연도, 와인 품질과 스타일, 용도 등의 정보를 새긴다. 와인 라벨이 탄생한 순간이다. 이처럼 와인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품질을 평가하는 것은 전문가의 몫이었는데 그들의 전문성과 영향력이 요즘의 저명한 평론가들 못지않았다고 한다.

기원전 1,300년대에 만들어진 투탕카멘의 묘에서도 재밌는 ‘라벨’이 발견되었다. 총 36개의 와인 항아리가 발굴되었는데, 이 가운데 온전한 것이 26개였다. 항아리에는 “즉위 4년, 강 서쪽의 아톤신전에서 빚음, 생명 번영 건강을 기원. 달콤한 와인. 아페레르쇼프가 양조함”이라고 적혀 있다.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와인 항아리에는 “유흥을 위한 와인. 최상급 와인. 납세용 와인. 공물용 와인”이라 적힌 인장이 발견되었다. 이를 보면 이집트에서 와인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와인은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바로 약이었다. 당시 이집트 의사들은 와인을 소화제, 구충제, 소변 조절제, 관장제로 처방했다고 한다. 게다가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나 소독제로도 처방했다 하니, 그야말로 ‘안티푸라민’ 못지않은 만병통치약인 셈이다.

이쯤이면 이집트인들의 음주 문화도 궁금해진다. 앞서 와인은 특권층의 술이라고 했다. 기후와 토양이 맞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자기들만 그 좋은 것을 누리려고 와인 산업을 더 이상 키우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기원전 3세기 이후부터는 포도밭 규모가 늘었지만 말이다. 이 탓에 이집트 사람들은 와인을 마시고 취하는 일을 자랑으로 여겼다고 한다. 특권을 누린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뽐내고 싶었으리라. 오죽하면 한껏 마시고 구토하는 것마저 자랑스럽게 여겼을까. 이들의 허세가 요샛말로 ‘쩔’지 않는가.

고대 이집트에는 모든 사람이 마음 놓고 실컷 술을 마실 수 있는 날도 있었다. 술로 하토르 여신을 속여 인류를 구원한 사건을 기념하는 음주 축제를 비롯해 여러 축제가 있었다고 한다. 서민들은 주로 맥주를, 귀족들은 와인을 마셨다. ‘영혼을 위해 마시고 취하라’라는 모토 아래 축제가 시작되면 시끄러운 음악과 함께 몸을 못 가눌 때가지 술을 마셨는데, 파라오도 참여했을 만큼 국가가 이를 적극 권장했다고 한다. 축제의 절정은 구토와 섹스였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런 축제에 무려 70만명가량 참여했다니, 오늘날의 옥토버페스트를 능가하지 않았을까.



이집트에는 이 축제의 장면을 담은 벽화들이 있다. 구토하는 사람, 정신을 잃고 들려 나가는 사람, 고함치는 사람 등 천태만상을 볼 수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여성의 사회적인 책임이 컸던 만큼 높은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따라서 다른 고대 사회와는 달리 여성이 음주를 하는 것도 전혀 별일이 아니었다. 한 그림에는 술에 취해 와인을 더 달라고 하는 여성의 모습과 외침이 고스란히 담겼다. “와인 열여덟 잔을 주세요. 목이 타들어가요. 마시고 취하고 싶어요!” 이 와중에도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몇몇 있었으니, 이들은 취한 사람을 들어서 옮기고, 종을 쳐서 깨우는 역할을 했다.

왜 이런 축제가 생겼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다만 축제가 끝난 뒤 이집트에는 아기가 많이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면 기쁨의 축제를 또 열지 않았을까.

벽화, 정원, 파라오, 피라미드, 포도밭, 죽음, 부활, 오시리스, 하토르, 축제, 귀족, 평민, 새 생명. 이처럼 의미의 간극이 큰 낱말들이 출몰하는 이번 칼럼의 주인공은 역시 이 낱말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는 술, 와인 아니겠는가. 필자 역시 목이 타들어간다.

시대의창 대표ㆍ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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