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방위? 정당방위? 그녀는 왜 그의 혀를 깨물었을까

입력
2020.09.1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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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면 만취 여대생 산길로 데려간 남성
강제 키스하다 혀 절단되자 여성 고소
"성폭력 사건 혀 절단, 정당방위 인정해야"



여름방학 기간 친구 3명과 부산으로 여행을 떠난 대학생 김수정(가명)씨는 여행 마지막 날 ‘피의자’가 돼 버렸다. 김씨가 생면부지의 30대 남성의 혀를 깨물었고, 그 남성이 김씨를 경찰에 신고했기 때문이다. 추억을 만들기 위해 떠난 여행은 졸지에 악몽이 됐다. 김씨가 당시 만취상태였기 때문에 자신과 남성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나지 않는 점도 김씨를 힘들게 했다.

김씨에게 지난 여름 부산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던 걸까. 김씨는 경찰이 폐쇄회로(CC)TV로 확인한 내용과 자신의 휴대폰 통화 및 문자메시지, 영수증 등을 토대로 그날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한국일보 기자들도 부산에서 사건 현장을 꼼꼼히 둘러보면서 그날의 진실이 무엇인지 함께 추적했다.



여성을 태운 차량은 숙소와 다른 방향으로

김씨는 토요일인 지난 7월 18일 늦은 밤부터 부산의 번화가인 서면역 인근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부산에 살던 친구의 지인들까지 합류해 동갑내기 7명이 모인 술 자리였다. 음주는 다음날(7월 19일)인 일요일 새벽까지 이어졌고, 김씨와 같은 숙소에 묵고 있던 친구들은 술을 못 이기고 하나둘씩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는 서면역에서 걸어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오피스텔이었다. 김씨는 그 자리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술을 마셨다. 김씨의 기억은 여기까지다. 술을 많이 마신 것까지는 알고 있지만, 이후에 벌어진 일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필름'이 끊긴 것이다.

결제 영수증을 확인해 보니, 술자리가 끝난 건 일요일인 19일 오전 6시40분. 김씨는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차가 다니는 번화가 일방통행 길로 나왔지만, 한동안 상가에 설치된 턱에 앉아 졸고 있었다. 오전 8시가 되자, 김씨 옆을 지나가던 차 한 대가 섰다. 남성이 차에서 내렸고 10분가량 김씨에게 말을 걸었다. 남성은 그러다가 차를 타고 가 버렸다. 그런데 10분 뒤 남성이 차를 끌고 다시 왔다. 그는 차에서 내려 김씨에게 또 말을 걸었고, 이번엔 김씨가 남성의 차에 탔다. 김씨의 휴대폰에는 차량에 탑승한 후 친구들에게 숙소 이름과 주소를 물어봤던 기록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숙소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김씨를 태운 차량은 김씨가 묵었던 숙소와는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차는 부산 중심부에 자리 잡은 황령산 등산로길에 세워졌다. 김씨가 가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장소였다. 이곳은 차가 없으면 오기 어려운, 인적이 드문 장소다. 김씨는 남성 차량의 블랙박스에 녹음된 음성을 들은 뒤 남성이 차에서 자신을 추행하고, 강간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녹음파일에선 한동안 침묵이 흐르다가 김씨가 ‘아’ 또는 ‘야’라는 소리를 냈고, 이후 혀가 깨물린 남성의 비명이 크게 들렸다. “남성이 몹쓸 짓을 하려고 하자 순간적으로 잠이 깨 저항을 한 것 같은데, 그럼에도 이를 무시하고 강제로 키스를 시도하니까 혀를 깨문 것 같다”는 게 김씨의 짐작이다.

혀가 잘린 남성은 병원으로 가지 않고 직접 운전해 황령산에서 가까운 부산의 광남지구대로 갔다. 그리고 남성은 그 자리에서 김씨를 고소했다. 자신에게 상해를 입혔다는 이유였다. 김씨도 가만있지 않았다. 남성을 강간상해 혐의로 맞고소했다. 남성에게 저항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보이는 상처가 김씨의 얼굴과 몸에 선명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수사 중인 부산남부경찰서는 “한 점 의혹이 없도록 수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성폭력 사건에 있어서 최근 피해자의 방어행위를 정당방위로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56년 전 성폭행을 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었다가 상해죄로 처벌받았던 최말자 할머니가 최근 재심을 신청한 곳도 부산이다. 혀를 깨문 김씨의 행위는 정당방위로 인정될까, 아니면 과잉방위라는 판단이 내려질까.



만취한 인사불성 여성에게 동의 구했다?

사건 발생 한 달 뒤인 지난 8월 20일 한국일보 취재진은 직접 부산을 찾았다. 혀 절단 행위를 정당방위로 볼 것인지, 과잉방위로 해석할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 될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취재진은 김씨가 머물던 숙소 및 친구들과 술을 마신 장소, 김씨가 남성 차량을 탄 현장과 차량이 멈춘 황령산 등산로길, 그리고 광남지구대를 차례대로 찾았다.

김씨가 술을 마셨던 서면 일대는 부산의 대표 상권답게 음식점과 술집들이 즐비했다. 평일 오전이었지만 밤새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는 젊은 사람들이 간간이 눈에 띌 정도였다. 김씨가 한 달 전 술을 마셨던 장소도 번잡한 골목길에 위치해 평소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포장마차 형태의 주점이었다. 김씨의 숙소였던 인근 오피스텔에서 걸어가 봤더니, 11분 정도가 걸렸다. 숙소가 주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술에 취한 여성이 이동하기엔 멀게 느껴질 수 있는 거리였다.

일요일 아침 술자리가 정리된 뒤 김씨는 걸어서 1분 거리인 일방통행 길로 나와서 유명 의류매장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만취한 김씨가 잠시 쉬던 곳은 옷가게와 카페, 음식점이 늘어선 거리였다. 남성은 왜 일요일 아침 한산해진 서면 유흥가를 돌아다니며 만취한 여성에게 말을 걸고 차에 태우려 했을까. 서면역에서 황령산 등산로까지는 4㎞ 정도로, 차를 타고 이동해 보니 15분 정도가 걸렸다. 이곳은 서면역 인근에 위치한 김씨 숙소에선 한참 벗어나 있었다. 고순생 부산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여성을 도와줄 생각이었다면 숙소로 데려다줘야 하는데, 황령산 등산로길은 '아베크족(젊은 남녀)'이 차 안에서 성관계를 하는 장소로 유명한 곳”이라고 말했다. 남성이 처음부터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김씨에게 접근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취재진이 서면에서 차를 타고 이동해 보니, 아파트 단지를 지나 황령산으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서자 도심 풍경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골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동네가 보였고, 좁은 산길을 따라 더 올라가자 양옆으로 숲이 우거진 2차선 도로가 나왔다. 갓길에는 차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지만, 지나가는 차량 안에서 주차된 차 내부를 들여다보기는 어려웠다.

남성은 "드라이브 가자"는 자신의 제안을 김씨가 받아들였고, 황령산에서도 김씨의 동의 하에 키스를 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납득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많다. 남성이 김씨 동의를 받았다면, 김씨가 굳이 남성의 혀를 깨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순생 대표는 “의사판단 능력이 없는 상태의 여성에게 동의를 구했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무선 한세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도 “만취 상태에선 정확한 의사표현이 힘들다. 동의나 거부를 명확히 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여성이 동의한 것으로 보긴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일보는 남성 측의 입장을 듣기 위해 연락을 취했지만 남성은 이번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김씨의 변호를 맡고 있는 법무법인 법과사람들 우희창 대표변호사는 "김씨가 남성의 혀를 절단함으로써 상해를 입게 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어디까지나 성폭력으로부터 김씨의 인격과 신체를 지키려는 생각에서 취해진 정당방위이기 때문에 위법성이 없다고 봐야 한다”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성폭력 사건에서의 혀 절단 행위가 정당방위로 폭넓게 인정돼야 한다"고 밝혔다.


인터뷰 응한 김씨, "도리어 고소 당해 어처구니 없었다"


“성폭력을 당했는데 고소라니,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지난 8월 13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김씨는 이렇게 말했다. 김씨는 성폭력 피해자인 자신이 피의자가 돼 버린 상황이라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7월 19일 부산 여행 도중 30대 남성에게 중상해를 입힌 혐의로 부산 남부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경찰공무원을 꿈꾸던 김씨는 이 사건으로 모든 일상이 어그러졌다. 내년 2월 졸업을 앞두고 취업에 도움이 되는 자격증을 취득하려고 했지만 충격이 가라앉지 않아 시험을 취소했다. 혀 절단 행위가 정당방위로 인정돼 무혐의 처분을 받은 경우가 있지만, 만약 기소돼 법정에 선다면 경찰의 꿈을 접어야 할 수도 있다. 그 사건 이후 일상에 집중이 안 되다 보니, 수험서가 눈에 잘 들어올 리가 없었다.

정신적 고통 외에 김씨의 몸에는 뚜렷한 외상이 남아 있다. 모두 성폭력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생긴 상처들이라고 김씨는 말한다. 그는 “사건 직후 턱이 2주 동안 부어 있었고, 입술 근처 상처는 입 안쪽까지 깊게 파고들어서 흉터가 남았다”고 밝혔다. 실제로 인터뷰 도중 김씨가 마스크를 벗자, 입술 주위가 상처투성이였다. 김씨는 입술과 구강의 손상 및 타박상, 어깨와 팔의 찰과상 등으로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김씨는 특히 남성의 주장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자신보다 열 살 이상 많은 생면부지의 남성이 만취해 길가에 앉아 있던 자신에게 접근한 것 자체가 불순하다는 것이다. 김씨는 “남성은 내가 동의한 뒤 키스했다고 하는 것 같은데, 만취 상태인 사람에게 동의를 구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 합의가 있었다면 혀를 깨물 이유가 없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김씨는 사건 당일 경찰서에 와서야 자신이 남성의 혀를 깨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정도로 인사불성 상태였다. 부산 여행 마지막 날이었고, 전날부터 다음날 새벽 6시가 넘도록 친구들과 술을 마셨기 때문이다. 김씨는 술에 취한 자신을 숙소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친구들을 먼저 집으로 가게 했고, 도로에서 잠깐 쉬던 중 남성의 차량을 타게 됐다. “그 일을 겪고 나니 이제 술만 보면 몸서리를 쳐요. 마시고 싶은 생각이 전혀 안 들어요. 끔찍한 경험을 했으니까요.”

김씨는 남성의 혀를 절단한 건 혀 속으로 이물질이 들어오자 본능적으로 방어한 행동으로 보고 있다. "당시 상황이 기억이 나지 않지만, 차량 블랙박스에 녹음된 음성을 들어보면 강간 시도가 있었던 것 같아요. 남성에게 무언가를 ‘빼라’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제가 거부하는데도 강제로 키스를 하니까 혀를 깨문 것 같아요.” 이런 정황을 근거로 김씨는 지난달 6일 남성을 강간상해 혐의로 고소했고, 현재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이다. 결국 김씨는 남성을 강간상해로, 남성은 혀가 잘린 부분을 문제 삼아 김씨를 중상해로 고소해 수사기관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부산= 채지선 기자
부산= 이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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