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집‘. 내가 찾아가는 게스트하우스는 이름부터가 수상한 ‘수상한 집’이다. ‘수상한 집’이라는 이름에 한번 놀란 뒤, 이층의 근사한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우리는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멋있는 현대식 집안에 보급형 서민주택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집속에 집’이라니?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진풍경이다. 왜 이곳이 한국근현대사 기행에 들어가야 할 역사의 현장인가.
“감옥에서 나오면 그래도 누울 곳은 있어야지.” ‘수상한 집’ 속에 있는 80년대 제주식 서민주택은 국가보안법에 의해 조작간첩으로 오랫동안 옥살이를 한 강광보씨가 감옥에 있을 때 그의 부모님이 매일 눈물을 흘리며 아들이 출소할 때를 대비해 손수 지은 집이다.
그렇다. 이곳은 강씨가 2017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뒤, 그 보상금과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아 ‘제주 4ㆍ3항쟁’과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생긴 ‘여순사건’ 때문에 생긴 국가보안법을 증언하고 사람들이 이를 고민하도록, 지은 정말 수상한 집이다.
계획은 부모님이 짓고 강씨가 출옥 후 살던 집 옆에 작은 ‘국가보안법 박물관’으로 새로 이층집을 짓는 것이었는데, 문제가 생겼다. 부모님이 지은 집이 무허가였던 것이다.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건축을 맡았던 사람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무허가인 부모님 집을 안에 넣고 그 위에 새 집을 짓자는 것이다. 집 속에 집이 있는 특이한 집은 이렇게 탄생했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국가보안법 피해자가 많지만, 가장 많은 곳이 제주도일 것이다. 4ㆍ3으로 인해 많은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제주도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에 친척이 있다. 따라서 일자리 등을 찾아 일본으로 밀항해 건너갔다가 경찰에 잡혀 오는 사람도 많다. 일본은 친북인 조총련이 활발히 활동했던 곳이기 때문에, 수사당국이 이들을 간첩으로 몰고 가 국가보안법으로 잡아넣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1941년 제주에서 태어난 강씨는 가난으로 고통을 받다가 1962년 친척들이 자리 잡고 있는 일본으로 밀항했다. 강씨는 친척의 도움으로 공장에서 일했고 결혼을 해 단란한 가정도 꾸리고 살았다. 그러나 1979년 불법체류자로 적발돼 가족들과 귀국해야 했다. 그는 추방되기 전, 영사관에 가서 친척 중에 조총련도 있다고 자진신고했다.
영사관은 별일이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제주공항에 도착하자 중앙정보부에서 나와 있었다. 사흘간 고문을 받았지만 별 혐의가 없자 그는 풀려났다. 하지만 경찰이 다시 찾아왔고 전기고문 등 60일간 고문을 당하며 조사를 받다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10ㆍ26거사’로 박정희정권이 무너지자 풀려났다. 혐의가 풀렸다고 생각하고 그는 생업에 종사했다.
6년 뒤인 1986년 누군가 찾아왔다. 군정보기관인 보안사령부였다. “여기 들어오면 벙어리도 말을 하게 돼 있다.” 이렇게 시작된 심문은 40일간의 고문으로 이어졌다. “정보부와 경찰이 아니라고 풀어줬는데 왜 그러느냐”고 읍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결국 그들이 시키는 대로 조총련의 지시에 의해 간첩으로 귀국해 국가기밀을 수집해 보냈다고 자술서를 썼다.
이렇게 간첩은 만들어졌다. 보안사에 잡혀 그 요원으로 일하다가 일본으로 도주해 자신의 경험을 쓴 '보안사'에 따르면, 수사관들은 진급 등 실적이 필요하면 고문으로 재일교포 등과 관련시켜 간첩을 만들어냈다고 폭로했다. 강씨 역시 아마도 보안사 조사관이 집을 사기 위한 목돈이나 진급 때문에 실적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는 국가보안법으로 7년을 선고받았고 5년4개월을 살고 1991년 출소했다. 나와 보니 가족은 풍비박산이 나고 그는 혼자 몸이 되어 있었다. 몇 년 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는 아직도 혼자 살고 있다. 강씨는 2013년 재심을 신청하여 2017년 무죄판결을 받았다.
일종의 작은 ‘국가보안법 기념관’인 ‘수상한 집 광보네’에는 그가 감옥에서 어렵게 구해 공부하던 책들, 그와 같이 비슷한 고통을 겪었던 강희철씨 등 제주출신 조작간첩 희생자들의 사진과 사연이 벽에 전시되어 있고 이들의 구술기록과 영상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강광보씨처럼 어려서 일본에 건너갔다가 불법체류로 추방되어 돌아온 뒤 간첩으로 조작되어 12년을 살고 나온 뒤 무죄판결을 받은 강희철의 절규가 눈에 밟힌다. 그는 우리에게, 한국현대사에게, 묻고 있다. “누가 빨갱이를 만듭니까? 누가 죄를 만들고.”
1949년 국가비상사태에서 제정된 대표적인 반민주, 반인권 악법인 국가보안법은 이제 그 나이가 70살이 넘어섰고 촛불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건재하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국가보안법의 희생자가 됐을까. 정확한 통계는 없다. 한국전쟁과 관련해, 법적 조치도 없이 즉결심판권을 마음대로 행사했던 이승만정권 시대에는 이에 대한 통계가 전혀 없다. 다만 진보당의 조봉암이 이를 이용한 정치탄압으로 사형을 당했다.
한 집계에 따르면, 박정희정권 들어서는 연평균 380명씩, 총 7,800명이 이로 구속됐고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초기에도 크게 줄지 않았다. 특히 대통령이 색깔론의 피해자였던 김대중정부도 외환위기에 따른 구조조정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불온서적 소지 등을 이유로 국가보안법으로 줄줄이 구속했다. 다만 2000년 남북정상회담 후 구속자는 줄어들어 박근혜정부까지 55년 동안 대강 1만 5,000명이 구속됐다. 연 평균 280명이 고통을 당한 것이다.
강광보씨만이 아니라 최근 무죄판결을 받은 1950년대 조봉암으로부터 박정희시대의 인혁당재건위, 영화 '변호인'의 주제가 된 전두환정권의 부림사건 등 한국현대사는 국가보안법에 의한 ‘용공조작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같은 용공조작은 없어졌는지 모르지만, 문재인정부 들어서도 얼굴인식프로그램 개발과 관련해 북한과 사업을 진행하던 사업가가 구속됐고 북한의 주체사상 자료 등을 소지하고 있어 국가보안법 찬양고무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통합진보당원이 파기환송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북한자료 등 ‘이적 표현물’을 가지고 있는 것이 처벌대상이 되는가. 노무현정부 시절 극우논객인 조갑제가 ‘좌파정부에 대한 무장봉기’를 선동해 친노단체들이 그를 국가보안법으로 고발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를 비판하며 '한국일보'에 쓴 ‘조갑제를 위한 변명’에서 지적했듯이,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은 사상, 표현, 결사, 언론의 자유이며, 아무리 ‘틀린 주장’이라도 이를 보장하는 데 있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민주주의 평가단체인 미국의 프리덤하우스는 우리의 정치적 민주주의의 점수를 국가보안법으로 사상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는 이유로 대만보다 낮은 점수를 주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일본 방문 중 이야기했듯이, “우리도 일본처럼 공산당을 허용할 때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될 수 있다.”
참고로 북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힘을 가진 중국과 대립하고 있는 대만도 오래 전에 이를 허용했다. 나는 우리도 이제 광화문에서 “김정은 만세”를 외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체제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으며, 사람들은 그가 술 취했거나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테러 등 체제에 위협이 되는 행위는 내란죄 등으로 처벌하면 되기 때문에, 국가보안법, 특히 ‘적을 이롭게 하는’ 표현물의 제조, 보유 등을 처벌하는 7조5항은, 이제 합당한 장례식을 치러줘야 한다.
실화에 기초한 '스코키'라는 영화가 있다. 1970년대 극우인종주의집단인 KKK가 독일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마을 스코키에 집회시위 허가를 신청했다. 마을사람들은 충격에 빠졌고 집회를 불허했다.
그러자 우리로 치면 참여연대 같은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적 인권단체인 ACLU(미국시민 자유연합)가 이 마을이 KKK의 집회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시정부를 연방법원에 고발했다. 이 사건을 맡은 변호사는 유대인으로 부인을 수용소에서 잃은 할아버지는 그의 뺨을 때리며 절교를 선언했다.
그는 할아버지에게 말한다. “그들의 주장이 틀리다는 이유로 막으면 그들도 우리의 주장이 틀리다며 억압할 것이며, 그러면 우리도 나치사회가 됩니다.” 그렇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은 ‘틀린 주장’도 주장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수상한 집 광보네’를 나서는 나에게 강희철씨의 절규가 들려왔다. 누가 빨갱이를 만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