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X자식.”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빈소에서 여당 대표는 고인의 성추행 의혹에 대한 질문을 받고 “예의가 없다”며 욕설을 내뱉었다. 장례가 끝난 뒤 피해자에게 사과는 했으나 “피해 호소 여성”이라는 용어를 썼다. 서울시 구청장들은 “박 시장의 시정 철학을 유지하자”고 발표하면서 성추행 의혹을 “사적 영역”으로 치부했다. 지금 와 돌이켜보면 새삼 놀랍지 않다. 이름 없는 피해자보다 유력한 가해자가 늘 존중받았으니까.
그러는 사이 피해자의 진실성은 의심받고 피해 사실은 휘발된다. 어쩌면 일상에서 성폭력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여성 대다수가 겪었을 일이다. 직장과 조직은 가해자를 두고 처자식을 둔 가장이라거나 앞날이 창창한 나이라는 점을 들어 손쉽게 용서를 입에 올리며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법도 가해자 처지에 동조한다. 세계 최대 성착취물 사이트라는 ‘웰컴 투 비디오’ 운영자 손정우는 형량이 낮은 건 차치하고 결혼으로 부양가족이 생겼다며 감형까지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입증하려면 온 생을 걸어야 한다.
‘폭력의 진부함’은 성폭력을 비롯, 진부할 정도로 반복되는 차별과 폭력 문제를 다룬다. 폭력에 맞서는 폭로란, ‘보이지 않은 인간’으로 지워진 피해자, 소수자들이 ‘보이는 존재’가 되는, 폭력을 드러내도록 하는 분투이자, 최후의 구조요청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겪어온 성폭력을 복기하며 일상의 폭력, 폭력의 문화화를 다룬다. 그 뒤 개인 경험을 넘어 사회 현상 분석으로 나아간다. 개인적인 사건이 결코 개인적이지 않음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 과정에서 여성을 멸시하고 혐오해 온 남성 권력의 뿌리가 낱낱이 드러난다.
저자는 “폭력에 맞서는 개개인의 발화가 중요하며, 더 많은 발화가 공론장에 쏟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빼앗긴 얼굴과 이름과 목소리를 되찾는 건, 개인성을 회복하는 일이며 스스로 주인이 되는 분투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고, 들리지 않은 것을 들으려 하고, 이름 없는 자의 이름을 부르자. 우리는 서로에게 침묵하는 목격자가 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발화가 연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