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하르트 글은 슬픔이고 좌절이다

입력
2020.09.04 04:30
19면
<32> 토마스 베른하르트 '모자'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작가들이 첫손에 꼽는 산문가, 박연준 시인이 '한국일보'에 격주 금요일 글을 씁니다.




헤매고 싶어서 읽는 책이 있다. 명료한 답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혼란 속에서 거닐고 싶어서 읽는 책. 토마스 베른하르트(1931-1989)의 소설집 '모자'가 그렇다. 이 책은 작고 가볍다. 열 편의 짧은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무지막지한 ‘진실’이 담겨있고, 그 때문에 불편하다. 아름답거나 따뜻한 이야기? 그런 건 없다. 소설을 구성하는 서사나 사건의 인과도 희미하다. 오로지 인물의 고통과 파국으로 치닫는 현재, 죽음의 징후가 있을 뿐이다. 비평가 페터 함의 말대로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세계는 한번 접하고 나면 도저히 피할 수 없다.”(옮긴이의 말 재인용) 일단 시작하면 멈추는 게 어려울 정도로 빨려든다.

나는 유년을 ‘아름다운 시절’이라 말하는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과격한 말일 수 있지만 아이는 (보호라는 명분 아래 존재하지만) 세상에서 피지배자다. 아이를 지배하(려)는 것이 너무 많다. 어른들, 시스템, 낯선 환경, 오염된 환경, 새로운 자극, 모험, 소문, 경계, 속박, 과보호, 방기, 전쟁, 전쟁보다 더한 위험요소들, 작금의 마스크―아이들의 얼굴에 ‘씌워지는’―까지,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폭력적인 (지배)요소가 많다. 베른하르트는 어린 시절의 불안과 두려움, 상처의 기억에서 인물들이 겪는 문제의 원인을 찾는다. 의식의 흐름, 착란, 기억과 광기로 이루어지는 인물의 독백은 독창적이고 적나라하다.


"그에겐 너무 크고 너무 엄청났던 지하실과 현관과 복도의 둥근 천장, 그에겐 너무 높았던 돌계단, 너무 무거웠던 들어 올리는 문들, 너무 큰 저고리와 바지와 셔츠들(거의 아버지가 입던 낡아 빠진 저고리와 바지와 셔츠들), 너무도 날카로운 아버지의 휘파람 소리, 어머니의 비명, 누이들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 뛰어다니는 쥐들, 짖어대는 개들, 추위와 굶주림, 지루한 고독, 그에겐 너무 무거웠던 책가방, 빵 덩어리들, 옥수수자루들, 밀가루 부대들, 설탕 부대들, 감자 자루들, 삽들, 강철 곡괭이들, 이해할 수 없는 지시, 과제, 위협, 명령, 체벌, 징벌, 구타와 폭행 등이 그의 유년기를 구성했다.”(77쪽)

소설의 인물들에겐 권력자로서의 부모가 있거나 돌아오고 싶지만 끔찍한 기억 때문에 돌아올 수 없는 고향이 있다. 그들은 나약한 존재로 태어나 나약함을 유지한 채 성장한다. 나약함이 그들을 광기에 빠지게 하고, 정신착란을 일으키게 한다. 그들은 나약해서 범죄자나 살인자가 된다.

“남을 때리거나 죽이는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의 나약함으로부터 갑자기 벌떡 일어나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117쪽) 착해지고 싶지만, “그럴 능력”이 그들에게 없다. 다른 인물들 역시 정신병자, 자살욕구에 시달리는 자, 낙오자, 그도 아니면 시인이 된다. 시인이나 예술가는 효용가치가 없기에 가족이나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가족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순전히 무용지물인 게오르크는 늘 그들을 방해하는 목에 걸린 가시 같았는데, 게다가 시를 쓰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달랐다.”(76쪽)


'가볍고 즐겁고 재밌고 신나는’ 콘텐츠가 각광받는 이 시대에 베른하르트의 소설을 읽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마도 소설을 읽는 내내 웃을 일은 없을 것이다(웃을 만한 이야기가 없다). 유익하지도 않을 것이다. 심각하거나 쓸쓸한 표정을 짓게 될 것이다. 어두워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지도 모른다. 쓸쓸하고 끔찍한데, 다 읽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될지도 모른다. 슬픈데 충분한 기분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소설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문맹'에서 이렇게 썼다. “그렇지만,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작가이고 싶은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모범으로서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작가의 중요 임무 중 하나가 쓸쓸한 자들의 목소리를 진실 되게 담아 보여주는 일이라면 베른하르트는 잔인할 정도로 그 임무를 잘 수행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슬픈 걸 좋아하는 일, 쓸쓸한 자의 문제적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 문학 독자의 임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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