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8월 14일 당시 67세였던 고 김학순 할머니는 50년 전 열 일곱 꽃다운 나이에 중국 베이징에서 일본군에게 끌려갔던 날의 끔찍했던 기억을 세상에 꺼냈다. 국내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가 공개 증언의 형태로 처음 알려진 날이었다. 그날 이후 수많은 피해 사례들이 알려져 할머니들의 노력 덕분에 국제적인 여론도 이끌어 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국내에 존재하는 위안부 피해자에게만 집중한다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점령했던 동남아시아 국가 곳곳에도 위안부 피해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김영수(70) 번역가는 위안부 피해를 입은 동남아 국가들 중에서도 인도네시아의 사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다. 사실 그가 이 문제에 천착한 지는 상당히 오래 됐다. 김 번역가는 김 할머니 첫 증언이 있던 바로 그 해 국내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TV 프로그램의 프로듀서(PD)였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위안부 연구를 시작했다. 지난달 6일에도 김 번역가는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서 열린 국내 첫 인도네시아 일본군 위안부 연구 학회(콜로키엄)의 진행자로 나서, 인도네시아 동부 부루섬의 피해 사례를 연구한 논문을 발표했다.
김 번역가는 인도네시아의 위안부 문제는 한국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메워야 할 '빈 구멍'이라고 표현했다. 인도네시아 피해자들을 연구하게 되면 궁극적으로는 일본군을 따라 수천㎞ 떨어진 적도까지 끌려갔다가 국내로 돌아오지 못한 미귀환 한국인 위안부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일본이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를 몰아낸 직후인 1942년 8월 부산항을 출발해 동남아시아로 향한 일본 선박엔 위안부로 끌려온 여성 150여명이 탑승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중 23명의 소녀들이 인도네시아 땅을 밟았다.
김 번역가는 인도네시아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 동원은 국내 위안부와는 다소 다른 양상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하급 관리들의 딸을 상대로 "일본에서 학업을 이어가게 해주겠다"고 속인 후 위안부'로 데려가는, 이른바 '학업 사기'가 전형적이었다. 김 번역가는 "당시 서구 열강인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던 인도네시아를 일본이 구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을 때였다"며 "이 때문에 이런 학업 사기가 통했다"고 설명했다. 주로 초등학교 졸업생들이 피해자였으며 당시 이들의 평균 나이는 18세도 채 안 됐다고 한다. 이렇게 동원된 인도네시아 위안부의 규모는 최소 1만명부터 최대 1만5,000명까지로 추산된다.
인도네시아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제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이슬람 교리의 특수성 때문이었다고 한다. 김 번역가는 "종교 교리상 위안부에 대해 '이미 더럽혀진 몸'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설명했다.
김 번역가는 인도네시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조명하는 작업에는 오랫동안 이 문제를 다뤄 온 한국의 역량이 투입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내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야 할 때"라며 "활동 범위를 전세계를 넓혀 자료를 수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에 천착해 온 김 번역가의 최종 목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가 가장 컸던 부루섬에 직접 찾아가 한국인 위안부의 흔적을 찾는 일이다. 인도네시아로 끌려간 한국인 위안부에 대한 연구나 조사 활동이 거의 없어, 당시 위안부의 규모나 피해 사례 등은 아직까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