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대폭발 참사에 신음하고 있는 레바논을 다시 방문했다. 지난달 4일 베이루트 항구 대폭발 이틀 만에 레바논을 찾아 민심을 다독이며 했던 재방문 약속을 지킨 것이다. 국제사회의 지원을 끌어내는 중재자 역할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그러나 재정 지원이 급한 레바논은 마치 마크롱의 개혁 압박에 대한 ‘숙제 검사’를 받는 듯 서둘러 새 총리부터 지명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달 31일(현시시간) 한 달도 안돼 1박2일 일정으로 레바논을 재방문했다. 1일이 레바논 건국 100주년이라 이를 계기로 삼았지만, 첫 행보는 대통령이나 신임 총리 지명자와의 만남이 아니라 ‘국민 가수’ 페이 루즈의 자택 방문이었다. 루즈의 대표곡 ‘베이루트를 위하여’는 1970~80년대 내전 당시 국민 애창곡이었고, 그는 8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도 레바논의 평화ㆍ통합의 상징으로 꼽힌다. 레바논 국민들은 최근에도 이 노래로 초대형 폭발 참사의 고통을 이겨내고 있다고 한다.
마크롱 대통령은 1시간 정도 면담한 뒤 “그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얘기했다”면서 “페이 루즈는 우리가 꿈꾸고 사랑하는 레바논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이날 만남은 지난달 방문 당시 “프랑스가 레바논의 내정을 간섭하고 있다”는 국제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을 불식시키려는 제스처로 보인다. AP통신은 “신(新)식민주의 비난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 했고,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는 “신임을 잃은 레바논 정치계급보다 대중적 인물 편에 서는 조심스러운 움직임”이라고 논평했다.
물론 속내는 다르다. 레바논의 정치 개혁과 베이루트 재건 등 진행 상황을 점검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1차 방문 때 마크롱은 전 세계로부터 약속 받은 지원 자금 2억5,000만유로(약 3,500억원)의 집행 조건으로 레바논 정치권의 개혁을 내세웠다. 18개 종파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정정이 불안한 레바논은 폭발 참사 이후 민심이 완전히 정부에 등을 돌린 상태다.
이 때문인지 현지 정치인들은 마크롱의 눈치를 잔뜩 살폈다. 그가 레바논에 도착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무스타파 아디브 전 독일주재 대사를 부랴부랴 신임 총리로 지명한 것만 봐도 그렇다. 프랑스 보도전문채널 프랑스24는 “프랑스의 압박 탓에 마크롱 대통령 도착이 임박해 신임 총리를 공표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무명의 새 총리를 두고 후한 평가는 나오지 않고 있다. 미셸 아운 레바논 대통령은 아디브를 “종파를 통합하고 개혁을 이룰 인물”로 치켜세웠지만, 정치 비평가들은 소수의 종파 지도자들이 중요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하는 레바논 정치의 특성상 개혁 추진의 적임자로 보기엔 어렵다고 비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