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즐겨 시청하는 TV 프로가 있다. ‘바쁜 현대인의 집 찾기를 위해 스타들이 직접 발품을 팔아 집을 구해 준다’는 모토 아래 집 소개 배틀을 벌이는 프로다. 방송을 보노라면 별별 기발한 콘셉트의 집들이 다 있구나 싶다. 경쟁을 하는 양 팀 패널들이 집 내부 못지않게 눈을 부릅뜨고 강조하는 것이 지리적 이점이다. 흔히 역세권, 숲세권, 학군 등으로 불리는 외부 요인들이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연스레 내가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지리적 요인은 뭘까, 생각하게 된다. 가만 떠올려 보니 몇 차례 집을 구하면서 주변 숲이나 교통 못지않게 중시한 조건이 하나 있었다. 떡세권이라고 하면 맞을까, 맛있는 떡집이나 방앗간이 주변에 몇 개나 되는지를 나는 항상 눈여겨보았다.
그런 면에서 가장 호사스럽던 집은 지금 서촌으로 불리는 옥인동의 오래된 빌라였다. 인왕산 기슭에 지어진 40년 된 집을 보러 갔던 날, 큰길에서 통인시장을 거쳐 집까지 이어지는 800m 거리에 떡집과 방앗간이 무려 여덟 개나 있다는 사실에 쾌재를 부르며 즉석에서 전세 계약을 했었다.
얼마나 좋았던가. 펑펑 눈 내리던 저녁, 뜨끈한 가래떡이 못 견디게 먹고 싶어서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는 내 눈앞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방앗간 기계에서 김을 뿜으며 나오던 하얀 가래떡. 떡쌀까지 손수 불려서 가래떡 한 말을 맞추었던 아주머니께 방앗간 사장님이 양해를 구한 뒤 내게 세 자루를 내주셨다. 집으로 달려와 참기름장에 가래떡을 찍어 먹던 때는 행복해서 그만 눈물까지 흘렸다. 이틀 전에 예약해야만 맛볼 수 있던 비원떡집의 두텁떡은 지금까지 먹어본 모든 떡 중 가장 귀티 나는 맛이었다. 한 입 베어 물 때 입안 전체에 계피 향이 퍼지며 모종의 경건함마저 느끼게 하는 그 맛을 나는 평생을 두고 그리워할 것 같다. 포슬한 콩가루를 막 입혀서 판매하는 부여떡집의 인절미는 얼마나 감칠맛이 있었던가 말이다.
다행히 지금 사는 집 인근에도 아주 잘하기로 소문난 떡집이 세 개나 있어서 구미 당기는 떡을 아쉬움 없이 사 먹는다. 한데 나이 탓인지 작년 가을쯤부터 말캉한 수수 팥떡이 몹시도 먹고 싶어졌다. 어린 날, 막 수확한 수수로 가루를 내어 경단을 만들고 끓는 물에 익혀 건져낸 뒤 성긴 팥고물에 굴려 할머니가 입에 넣어주시던 수수 팥떡. 40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주름진 손과 얼굴까지 오버랩되면서 대책 없는 감상에 빠진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생뚱맞은 감정을 털어놓았다. “걱정 마라, 그러잖아도 돌아오는 윤하 백일에 백설기랑 수수 팥떡 해서 상에 올릴 테니 시간 맞춰 내려오면 되잖니.” 아하, 늦둥이 조카의 백일이 코앞이구나.
소풍 날을 고대하는 아이처럼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데 코로나19가 다시 브레이크를 걸었다. 서울 사는 내가 자칫 어린 조카와 나이든 부모에게 폐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이 들면서 고향 방문 계획을 접어야 했다. 백일축하 인사는 온라인으로 대체하고, 바로 어제 고향 집 거실에 간소하게 차린 백일 상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보았다. 엄마가 만든 수수 팥떡과 센스 만점 올케의 상차림이 맛깔스레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 놔, 코로나로 인한 영업손실이나 업무 불편쯤 응당 감수할 몫이라 여기며 의연했는데 못 먹은 백일 떡을 떠올리니 자꾸만 속이 쓰리다. 한심하고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