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치데믹(churchdemic) 초래한 교회, 방역지침 지켜라

입력
2020.08.28 18:00
22면
공동체 안전이 종교의 자유에 앞서
방역지침 무시하니 '코로나 앵그리'
맹목적 믿음보다 과학적 방역 필요



1978년 우리나라에 개봉됐던 재난영화 ‘포세이돈 어드벤처’는 맹목적인 종교적 믿음보다는 성직자의 리더십과 판단력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감미로운 주제곡 ‘모닝 애프터’도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뉴욕에서 아테네로 항해 중이던 유람선 포세이돈호는 한밤에 거대한 해일을 만나 배가 뒤집히면서 파티를 하던 300여명의 승객들이 우왕좌왕한다. 프랭크 스콧 목사(진 해크만 분)는 과학적인 판단을 근거로 뒤집힌 배의 상단으로 올라가야 ‘에어포켓’이 있어서 구조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하지만 상당수 승객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기도만 하면서 반대 방향으로 향한다. 스콧 목사는 일부 승객과 함께 배의 상단으로 향했고, 몇 번의 고비를 넘겨 어렵사리 승객들을 구조한다. 마지막 순간에 스콧 목사는 몸을 던져 뜨거운 김이 쏟아져 나오는 증기 밸브를 잠그고 익사한다.

스콧 목사는 앞서 승객들에게 “신에게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라”고 역설한다. 각자의 운명을 신에게만 맡기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맹신적인 태도를 비판한다. 중세 유럽에서 페스트가 퍼졌을 때 사람들이 신앙에 기대 교회에 몰려 기도를 한 것이 전염을 더욱 확산시켰다고 한다. 성직자의 잘못된 판단이 많은 신도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다.

매미 울음소리보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가까워지면서 폭염의 공포는 사라졌지만 코로나19의 공포는 더욱 커지고 있다. 코로나 사태의 와중에 종교집단이 감염원으로 자주 등장하면서 종교집단, 특히 그 집단의 성직자들에 대해 국민의 시선이 곱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은 개신교 지도자들을 만나 “8월부터 시작된 코로나 재확산의 절반이 교회에서 일어났다”고 했다. 이른바 처치데믹(churchdemic, 교회발 대확산)을 언급했다.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대표적이다. 그 교회 신도들이 대거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데 이어 전 목사가 광복절 광화문 집회에 참석하고 확정 판정을 받았다. 그럼에도 전 목사는 “외부 불순분자들의 바이러스 테러 사건”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펼치면서 정부기관과 언론 등을 상대로 무더기 고소ㆍ고발을 진행하고 있다. 적반하장이다.

이미 신천지교회에서 엄청난 확진자가 나오면서 대구 지역이 곤욕을 치렀다. 엄청난 예산과 의료진의 땀과 노력이 투입됐다. 교회의 집회 행태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쉽게 퍼트리는 구조다. 목사나 신도나 모두 맹목적인 신앙의 힘으로만 버티려다 사태를 더욱 키우는 분위기다.

지난주 말 정부의 ‘비대면 예배’ 지침에도 불구하고 전국 교회의 20% 내외가 대면 예배를 강행해 국민의 분노를 자아냈다. 국회마저 일시 셧다운되면서 국민들의 ‘코로나 앵그리’가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신앙 생활의 자유에 앞서 공동체의 안전과 생존이 더욱 중요한 문제다. 정부의 방역지침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공동체의 안전 앞에서 종교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도시국가 아테네에 창궐한 역병(페스트 또는 에볼라바이러스로 추정)으로 인구의 절반이 죽었고 끝내 아테네가 멸망했다. 중세에도 페스트는 전 유럽 인구의 3분의 1(약 2,000만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냈다. 당시 봉건사회와 교회의 절대 권위는 페스트로 치명타를 입었다. 학자들은 이 유행이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의 배경이 되었다고 평한다.”( ‘무서운 의학사’, 이재담 저)

이처럼 역병은 한 국가, 혹은 문명의 운명을 결정하는 변수로 작용했다. 그런데도 종교계 일각에서는 방역지침을 종교 자유의 잣대로만 바라보니 ‘코로나 앵그리’ 현상이 심화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왜 스콧 목사 같은 성직자가 없는 걸까.


조재우 에디터 겸 논설위원 josus6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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