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중요한 직위에 있는 사람에게 직속돼 있으면서 기밀문서나 사무를 맡아보는 직위, 또는 그 직위에 있는 사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비서(祕書)의 정의다. '숨길 비(祕)'와 '책 서(書)'가 결합된 말이다 보니, 은밀하다는 의미가 강하게 풍긴다. 비서직을 바라보는 일부 왜곡된 시각도 여기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비서라는 말이 이처럼 본래 의미와는 다르게 오염돼 있다보니, 대학의 비서학과 교수들은 '비서라는 명칭을 아예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진지하게 고민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지난달 26일 한국일보 본사에 모인 한국비서학회 회장, 전직 기업 최고경영자(CEO), 전ㆍ현직 고참 비서들은 비서직에 대한 이 같은 편견과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다양한 의견을 교환했다. 심재권 나사렛대 글로벌비서학과 교수(한국비서학회 회장), 4년 동안 삼성전자서비스 대표를 지낸 장형옥 사회복지법인 함께하는재단 이사장, 외국계 기업에서 근무했던 김수현 전 비서가 직접 참석했다. 현재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정은주 비서와 양효선 비서는 화상회의 플랫폼인 줌(Zoom)을 통해 참여했다.
비서 업무에 대해 외부에 정확히 알려진 게 없다 보니, 비서는 단순반복 업무만 하거나, 상사가 시키는 일만 하는 직업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실제론 그렇지 않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9년간 비서로 일해온 김수현씨는 비서 업무의 핵심을 "답이 없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상사가 협력업체 사람을 만날 때 '어떤 선물을 주는 게 좋을까'라고 고민할 때 정답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예컨대 협력을 잘하자는 의미를 전달하고 싶다면, 비서가 손을 붙잡고 있는 그림이 들어간 와인을 제안하는 식으로 스토리를 담을 수 있어요. 이런 건 인공지능(AI)이 인간을 대체하기 어려운 부분이에요.” 삼성전자서비스 대표를 역임하며 비서를 뒀던 장형옥 이사장도 같은 이유에서 비서를 ‘토털 솔루션 프로바이더(Total Solution Provider)’, 즉 해결사라고 불렀다.
비서는 기본적으로 CEO 또는 팀의 일정 관리, 내방객 응대, 전화업무 등을 담당한다. 하지만 본인 의지와 사내 분위기에 따라 업무를 확장하는 게 가능하다. 외국계 기업에서 비서로 일하는 양효선씨는 “우편물 관리, 상사 집무실 정리 등과 같은 통상적 업무 외에도 외부에서 열리는 교육을 대신 참관한 뒤 사내에서 브리핑하고, 여러 부서의 예산을 직접 관리하는 일도 하고 있다”며 “비서로서의 경력 개발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고, 회사가 수용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17년 차 비서인 정은주씨도 “일반적인 비서 업무 외에도 사무실 전체를 관리하는 오피스 매니저 역할을 겸하고 있다”며 “초반에는 상사에게 귀속돼 수동적인 면이 많다고 느낄 수 있지만, 어떻게 일하느냐에 따라 능력을 인정받고 다양한 기회가 주어진다”고 말했다. 정씨는 현재 주 1회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상사의 왜곡된 인식은 비서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과 현직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는 수많은 비서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있다. 비서를 동료 또는 같이 성장해 가는 파트너로 생각하기보다는 '마음대로 부려도 되는 존재' '의사를 무시해도 되는 존재'로 바라보는 상사가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심재권 교수는 “비서를 단순히 조수 정도로 생각하면 상사가 비서에게 ‘갑질’을 하게 되고 결국엔 오너리스크(owner risk)로 번질 수 있다”며 “특히 지방자치단체장 등 사회지도층은 인식 개선 차원에서 성폭력 예방 강의를 반드시 받게 하는 등 체계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비서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려면 상사 스스로 진정한 리더인지 반문하는 과정도 반드시 필요하다. 장형옥 이사장은 "존경받는 리더는 구두 맡기기 심부름을 시키는 등 비서를 종 부리듯 하지 않는다"며 "사장이라면 직책상 리더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를 존경해 따르는 사람이 없다면 진정한 지도자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경험에 비춰보면 내부 직원을 잘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 외부 고객에게만 잘 할 수는 없고, 좋은 제품을 만들 수도 없다”고 강조했다.
비서라는 직업을 연상할 때 물리적으로 상사와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지만, 이것도 비서직에 대한 편견이라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정은주 비서는 “코로나19로 재택근무를 많이 하게 되면서 화상회의와 메신저 등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데, 업무에는 큰 문제가 없지 않나. 대면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비서 업무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비서직에 대한 편견을 줄이기 위한 제언도 내놓았다. 이들은 비서 업무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오랜 기간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다국적 기업에서 비서 생활을 했던 김수현씨는, 알고 지내던 미국의 60대 비서가 퇴직하자, 그 자리에 손주를 3명이나 둔 어르신이 후임으로 왔던 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다고 전했다. 김씨는 “한자리에 오래 머물며 업무를 체득한 노련한 비서는 ‘내가 사장이 처음인데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라고 물어보면 가장 좋은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비서 채용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양효선 비서는 "국내에선 비서를 뽑을 때 경력보다는 나이와 인상 등 개인 신상을 더 보는 듯한 채용 공고가 여전히 많다"며 "채용 목적을 명확히 정하고, 어떤 일을 맡길지 내부적으로 검토한 후에 뽑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심재권 교수도 "우리나라는 개인적 친분에 기반해 비서를 뽑거나 비서학을 제대로 배우지 않은 사람을 채용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라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