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여년간 수작업으로 도장 제작" 인장공예 명장의 '18 ㎜ 예술'

입력
2020.08.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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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청계천로 도장가게 '박인당'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허름한 빌딩 한켠에 자리잡은 도장가게 ‘박인당(博印堂)’. 이곳엔 온종일 정적이 흐른다. 박호영(82) 대표가 50원짜리 동전보다 작은 인면(印面ㆍ글자를 새기는 부분)에 조각도를 대고 조심스레 움직일 때마다 종이 두께만큼 얇게 일어나는 티끌을 불어내는 ‘호’ 소리만 이따금 들릴 뿐이다. 그렇게 노신사가 혼신의 힘을 다해 ‘18㎜ (지름) 예술’에 몰입하면 1시간, 2시간 아니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간다. 손님이 들어와도, 휴대전화 벨이나 코로나 재난안전문자 알람이 울려도 모를 정도다. 뻣뻣해진 고개를 들어 낯선 이와 눈이 마주친다. 그때서야 겸연쩍게 웃는다. “아이고 미안해요. 언제 들어오셨어요?”

“온 신경을 집중하면 손님이 들어와도 잘 몰라. 어떤 손님은 그냥 들어와서 30분씩 서서 기다려. 인기척이라도 나면 일하는 데 방해될까 봐. 그러면 얼마나 미안한지…”

컴퓨터 프로그램과 기계로 뚝딱 도장을 제작하는 시대, 오로지 수작업으로 도장(印)에 인격(人格)을 담아내는 과정에 어떤 손님도 쉽사리 끼어들 틈은 없었다. 정부가 2004년 공인한 인장공예 명장 박 대표가 한평생 전통 인장을 예술로 승화하기 위한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는 순수인장 제조업체 박인당은 그런 곳이다.


이북출신 피란민 호구지책으로 인장업 시작… 서체 공부만 10년

박 명장은 순전히 호구지책으로 도장과 연을 맺었다. 함경남도 신흥 출신인 그는 6ㆍ25전쟁 당시 1ㆍ4후퇴 때 가족과 함께 거제도로 피란했다. 어린 나이에도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생계를 잇기 위해 피난민들에게 도장을 파주기 시작했다. 도장을 팔 재료가 변변치 않아 직접 나무를 해서 도장을 팠고, 쇠톱을 갈아서 도구를 만들어 썼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던 외가 친척이 그의 비범한 손재주를 보고 소개해 줘 1954년 서울 신당동의 인쇄업체 ‘일성당’에 취직했다. 16세에 어머니와 상경한 그는 그곳에서 서예가이자 전각가였던 김두칠 선생에게서 전통 인장 예술의 기초를 닦았다. 인장업에 필수인 ‘좌서(左書ㆍ오른쪽과 왼쪽이 바뀐 글자)’, 전서(篆書) 예서(隸書) 초서(草書) 등 한자의 5 서체를 익히고, 야간고등학교에 다니며 학업도 병행했다.

어느 정도 경험과 기술을 쌓은 그는 1963년 당시 을지로5가에 위치한 ‘부흥인쇄’에 책상 하나를 놓고 본격적인 인장업에 뛰어들었다. 인장업이 적성에 맞고, 먹고 사는 데 문제는 없겠구나 싶어 독립한 것이다. 그때부터 을지로, 퇴계로, 종로 일대를 전전하며 그의 이름을 업계에 알렸다. 도장을 정성으로 제작하는 것은 물론 고객의 이름을 장부에 기록하며 고객 관리도 철저히 하고, ‘박인당이 놀면 다 논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성실하게 일한 덕분이다. 각종 인장공예 경연대회에서 입상하며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때 인쇄업을 병행했다가 실패하기도 하고, 사기를 당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리고 1978년 청계천 인근 관철동의 한 건물에 사무실을 얻어 처음으로 ‘박인당’이라는 상호를 내걸었다. 이후 현재 사무실까지 이곳저곳 옮겼지만, 박인당이란 상호는 지켜오고 있다. 박인당은 ‘도장에 대해서는 잘 안다’는 의미를 담았다. 그 의미처럼 인장공예기능사, 인장공예산업기사 등 국가기술자격증을 취득하고, 옛 서화가와 문인학자들의 날인된 인장을 모은 문헌이나 자료를 보고 서법과 도법도 꾸준히 연구하는 등 인장업에만 매달렸다. 그는 2004년 정부로부터 기능인 최고의 영예인 ‘명장’(인장공예 부문)의 칭호를 받았다.




오로지 수작업으로 탄생하는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도장

도장은 사양산업이 된 지 오래다. 90년대 후반부터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기계가 보급돼 언제 어디서나 값싸게 만들 수 있고, 또 도장 대신 서명 거래가 일반화해 사용이 급격히 감소했다.

그런데도 그는 오로지 수작업만으로 세상에 하나뿐인 도장을 제작해오고 있다. 신뢰의 증표인 도장에 대한 나름의 확고한 철학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돈은 빌려줘도 도장은 빌려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 도장은 나를 대신하는 분신이나 다름없어서 그만큼 소중하단 뜻이야. 도장 한번 잘못 찍으면 패가망신하잖아. 그렇기 때문에 컴퓨터로 천편일률적으로 조각하면 안 돼. 나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그런 기계를 들여놓지 않았어. 그래서 수십 년 전에 내가 제작한 도장도 보면 알 수 있어.”

박 명장의 유일무이한 도장은 심혈을 기울여 제작된다. 먼저 이름의 의미를 고민해 몇 자를 새길지를 정한다. 여기에는 이름의 한자 총 획수에 따라 길흉이 달라진다는 성명학의 수리론을 적용한다. 복(福)과 운(運)을 타고났다면 이름 석자만, 그렇지 않으면 ‘印(인)’ ‘章(장)’ ‘信(신)’ 중 복과 운을 불러오는 글자를 더해 넉 자를 새기는 식이다. 여러 글씨체 중 어떤 서체가 잘 어울리는지, 글자 간 균형이 잘 맞는지도 꼼꼼히 따진다. 서체가 정해지면 붓으로 인면에 좌서로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쓴다. 그는 좌서를 거울에 비춰보지 않아도 삐뚤어지지 않고 잘 써졌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다음 가장 중요한 전각에 들어간다. 60여년을 칼을 잡았지만, 이때만큼은 그도 온 신경이 곤두선다. 글자의 새김새가 인장의 격을 살려서다. “조각도로 새길 때는 정신통일을 해야 해.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거든. 옆에서 잡음이 들리거나 누가 말을 시키면 지금도 한 번씩 헛칼질을 해. 힘 조절 잘못해 칼이 빗나갈 수도 있고.”

이런 방식으로 그가 제작하는 도장은 하루에 1~2개 정도다. 회사명과 대표이사 이름 등이 들어가는 법인인감의 경우 그 좁은 인면에 최대 24자까지 새기기도 한다. 도장 가격은 재료 등에 따라 10만원부터 400만원대까지 천차만별이다.


“4,200여명 고객 명부 관리… 젊은 사람도 믿고 찾아와”.

한눈팔지 않고 평생을 바쳐 살아왔지만, 그는 2000년대 초반 큰 시련을 겪었다. 청계천이 범람해 반지하 작업실이 수해를 입으면서 그 동안 쌓아놓았던 고객 명부와 지금까지 만들어온 도장 기록들이 모두 사라져버렸던 것. “아침에 나와 보니까 지하실에 물이 꽉 차 양수기로 퍼냈는데, 잉크가 다 번져 알아볼 수 없는 걸 어떡해.”

박호영 선생은 다시 일어났다. 고객 연락처 주소 인영(印影) 등을 컴퓨터에 저장할 수 있도록 전자 파일로 정리하고, 인터넷 대중화에 맞춰 홈페이지도 만들었다. 이후 새로 정리해놓은 고객 수만 4,200여명이다. 다소 까다로울 법한 대형로펌, 유명 IT기업, 사모펀드 운영사 등도 그의 고객이다.

“지금도 고객에게 전화 오면 이름만 듣고 언제 어떤 도장을 맞췄는지 아니까 손님이 놀라. 내가 인장업 동료들한테도 고객명부를 정리하라고 조언하지만, 이렇게 하는 사람이 없더라고.”

요즘에는 젊은 고객도 상당하다고 한다. 오랫동안 거래해 온 단골손님의 소개로 와 ‘믿고 맡길 테니 잘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처럼 도장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있어 가게를 꾸려 가고 있지만, 걱정도 적지 않다. 특히 자신이 천직으로 알고 일해 온 인장업의 대가 머잖아 끊기지나 않을까 걱정이 크다. “큰 아들이 좀 의욕을 보였는데, 일부러 안 가르쳤어. 인장업이 체질에 잘 맞았던 나 조차도 고된 일을 자식한테 물려주기가 좀 그래서 권하지 않았어. ”


제자가 춘천서 ‘박인당’의 명맥 이어가

사실 젊은 시절부터 명성을 쌓아온 박 명장에게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기술을 배우러 찾아왔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 “수십년 갈고 닦은 기술을 며칠 만에 배우겠다고 오는 사람이 많았어. 그런 사람들은 배울 자격이 없지. 또 까다롭게 교육시키니까 그만두고 나가고. 나는 지금도 부족하다고 느껴서 연구해.”

그중 유일하게 포기하지 않은 한 제자가 있다. 강원 춘천이 고향인 그는 아버지가 인장업을 했고, 본인도 인장업을 하다가 업계에서 소문을 듣고 박인당을 찾아와 수년 동안 일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80년대 후반 춘천에서 똑같이 ‘박인당’이라는 이름으로 가게를 차렸다. “제자가 상호를 ‘박인당’으로 하고 싶다고 하기에, 유일한 제자인 데다 춘천이면 내 영업에 지장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아서 허락했어요.”

제자가 춘천에서 ‘박인당’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박 명장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일을 할 계획이다. 주로 사용해온 오른쪽 눈은 시력장애의 일종인 ‘황반변성’ 증상이 생겨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일그러져 보일 정도로 시력이 악화했다가 치료를 받아 호전됐다고 한다.

“왼쪽 눈은 지금도 0.9일 정도로 좋은데, 오른쪽 눈은 조금만 들여다봐도 잘 안 보여. 작업 속도도 많이 느려졌지. 젊었을 때는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끄떡 없었거든. 그래도 눈이 피로하지 않고, 손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한 놓지 않을 거야. 한평생 인장을 만들었지만, 나는 지금도 부족하다고 느끼거든.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해야지.” 그는 진정한 장인이다.



박민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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