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 사라진 을지로의 비명, 30년차 장인들이 쫓겨난다

입력
2020.08.27 04:30
15면
당신이 몰랐던 ‘힙지로’의 이면, 
'재생' 사라지고 '재개발'만 남은 을지로



을지로를 걷다 보면 4차선 대로변을 조금만 벗어나도, 80년대 ‘제조업 전성기’를 연상케 하는 이질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 아래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쇠를 내려치고 금속을 깎는 이들은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의 ‘베테랑’ 기술인들이다. 못해도 30년을 같은 자리에서, 단 한가지 기술만을 연마해 온 도심 제조업의 '장인'들이다.

을지로에선 장인과 청년의 삶이 교차한다. 미대생과 공대생들이 이 일대를 안방 문턱처럼 넘나든다. '새로운 것'을 꿈꾸고 만들어 내기에 여기만 한 곳이 없어서다. 창업가, 연구자, 디자이너, 예술가로 변신해 이곳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장인들의 노련한 손맛, 밀도 높은 ‘연륜’에 기대기 위해서다.

을지로에서 30년째 금속 가공 공장 ‘삼성시보리’를 운영 중인 박춘삼(61) 사장과 이제 막 3년 차 창업가가 되어 세운상가에 입주한 조수아(34) 아몬드 스튜디오 대표도 그렇게 만났다. 조 대표의 감각적 디자인과 박 사장의 손길이 합작한 전통주잔 ‘술라’는 지난 6월 ‘텀블벅’을 통해 시제품 완판에 성공했다.

하지만 설렘도 잠시, 청년과 장인의 운명은 위기를 맞고 있다. 삼성시보리가 있는 세운 3구역으로 포클레인이 들어온 것이다. 서서히 멸종해 가고 있는 '을지로 장인'들의 이야기를 한국일보 뷰엔(view&)팀이 들어봤다.



탱크부터 인공위성까지… 무엇이든 뚝딱뚝딱 나오는 ‘요지경’, 그곳은 을지로

“디자인을 배울 때부터 을지로 일대를 누볐어요. 상상 속에서만 그려보던 이미지를 물성을 가진 ‘실물’로 구현한다는 건 언제나 어려운 문제였는데, 여기선 언제나 답을 찾을 수 있었죠.”

서른넷, 조 대표(이하 ‘조’)에 을지로는 '친정'이다. 그는 대학 졸업 후에도 시제품이 필요할 때마다 이곳을 찾았다. 창업을 결심하면서는 아예 을지로 한가운데에 있는 세운상가(세운메이커스큐브)에 둥지를 틀었다. “사장님들의 조언이 더 간절해졌거든요. 사업을 시작하니 ‘무조건 이 가격을 넘기면 안 된다’는 팍팍한 기준이 생겼어요. 학생 때보다 훨씬 더 어려웠죠.” 고민이 생기면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아버지뻘 사장님들이 '비빌 언덕'이 되어 준 셈이다. 2~3년 전부터 조 대표 또래 청년들이 세운상가로 몰려든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1978년부터 금속 가공(시보리) 기술을 배우기 시작해, 1984년 을지로에 입성했으니 벌써 4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일하다 손가락도 하날 잃었지요.”

예순하나, 박춘삼 사장(이하 ‘박’)에게 을지로는 ‘고향’이다. 시보리 기술자로 입정동에 들어온 이후 40년이 흐르는 동안 이곳을 떠나본 적이 없다. 제조업 부흥기였던 1990년대는 그야말로 전성기였다. 전국적으로 노래방과 나이트클럽이 우후죽순 생겨나며 특수 조명을 만들던 박 사장에게도 주문이 빗발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터무니없이 싼 중국산이 물밀 듯 들어왔고, 사업은 기울기 시작했다. 시제품을 만드는 대학생, 청년들과 본격적으로 가까워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실은, 자식 같은 친구들이라 가격을 높여 부르지도 못해요. 일 받아 봤자 커피값, 밥값 정도 나올 뿐인데, 여기 사장들 중에 젊은 친구들 찾아오는 걸 마다하는 사람은 없어요.” 오래도록 갈고 닦은 장인의 기술이 청년의 상상력과 만나 발휘하는 ‘시너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이웃 공장의 사장이 “재미있는 일거리가 있다”며 그를 불렀다. 거기에 조 대표가 있었다.


청년의 디자인과 장인의 손길이 만나는 ‘기회의 공간’

“거래처 사장님에게 ‘구리로 된 전통주 술잔을 만들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할까요?’하고 여쭸더니, 대뜸 어디론가 전화를 거시더라고요. 그게 박춘삼 사장님이었죠. 여기선, 이런 일이 흔해요. ‘어느 공장에 누가 잘한다’는 걸 다들 서로 알아요. 수십 년을 함께 해온 형제 같은 사이니까” (조)

을지로의 도심 제조업 지대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공간이다. 지도조차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골목길은, 실핏줄처럼 어지럽게 얽힌 가운데서도 견고한 질서를 이루고 있다. 주물공장은 목형업체, 도장업체와 연결돼 있고, 시보리 공장은 정밀가공업체와 긴밀하게 엮여 있다. 비슷한 업종 내에서 다양한 생산공정을 담당하는 기술자들이 ‘유기적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반경 500m 내에서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니거든요. 정밀가공부터 도장, 프레스까지 대한민국 A급이 여기 다 모여있지요.(박)” 박사장도 그런 A급 기술자 중 하나다.

조 대표가 원하는 제품은 까다로웠다. 형태의 아름다움을 살리면서도, 인체에 무해한 금속 술잔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협업 과정에서 수십 년간 다양한 고객들의 주문을 소화하며 연마한 박 사장의 노하우가 곳곳에서 빛을 발했다.


최소 만개 단위로 대량생산을 하는 공장에서는 새로운 제품을 꿈꾸는 청년들이 ‘끼어들 틈’이 없다. 고객의 의뢰와 주문에 따라 그때그때 물건을 만드는 을지로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청년과 장인이 만나 '시너지'를 내는 협업들이 좀 더 지속가능했으면 해요. 저희처럼 다양한 시도를 하는 창업가들에겐 이분들의 노하우만큼 소중한 게 없거든요. 이게 점점 소멸돼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저 안타까울 뿐이죠. ”(조)


‘재생’이란 빛 좋은 허울 쓴 재개발… “옛것은 모두 밀고 새로 짓는다”는 대전제는 여전


박 사장의 삼성시보리 공장에서 불과 500m 남짓 떨어진 세운3-1, 4, 5구역에선 현재 초고층 도심형 오피스텔 ‘세운 힐스테이트’ 공사가 한창이다. 이곳에 있던 가공 업체들 대부분이 하루아침에 강제 퇴거를 당했다. 2014년 을지로 일대 재개발을 중단하고 ‘도시 재생’ 지역으로 전환하겠다는 서울시의 계획이 흐지부지된 탓이다. 한술 더 떠, 세운 상가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밀어내겠다’는 발표가 이어졌다. 상인들의 거센 반발에 황급히 철회되긴 했지만 구체적인 대안 없이 시간만 흘렀다. 그 사이 시행사의 압박에 시달리던 장인들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가게를 정리했다. 박 사장이 수십 년간 몸과 마음을 부대끼며 일해 온 ‘형제 같은' 이들도 하나둘씩 사라졌다.


“한때는 믿었지요. 서울시가 나서서 수십 년 뿌리박고 일했던 사람들 쫓겨나지 않게 해준다고 약속했으니까... 이젠, 많이들 포기했어요.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데 우리가 힘이 있나요.”(박)

‘한꺼번에 밀어내면 재개발, 천천히 몰아내면 도시 재생’이라는 쓰디쓴 우스갯소리까지 등장했다. ‘재생’이란 허울을 쓴 재개발이 착착 진행되면서 이곳의 산업생태계는 서서히 파괴되고 있다. "주변 사람들과 다 연결돼 있는 산업인데, 그 고리를 끊어놓으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당장 내년의 상황도 캄캄하다 보니, 늘어가는 것은 한숨뿐이다.


세운상가 내 창업지원센터 ‘세운메이커스큐브’에 입주한 조 대표도 고심이 깊다. 세운상가를 에워싼 세운 3구역과 5구역 대부분이 재개발 지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의 생태계가 무너지면, 사실 저희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지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주변 장인들이 사라지면 여긴 그냥 ‘사무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는 거죠.” 조 대표는 최근 사업을 시작할 당시엔 없던 무거운 책임감이 생겼다. “사람들이 이곳의 필요를 잊지 않도록, 오직 ‘을지로’에서만 가능한 것들을 계속 보여주는 게, 저희 소명이자 책임이라는 생각마저 들어요. ”



이 도시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을지로에서 ‘재생’은 이미 사라졌다. 옹색하게 구색을 맞춘 ‘철거형 도시재생’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했지만, 빈축만 샀을 뿐이다. “지역의 환경을 개선해서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 ‘재생’이란 공공사업의 목적이라면, 100명의 원주민이 100% 돌아와야 해요. 그런데 실상은, 100명 중 단 10명도 못 돌아오죠. 그게 어떻게 공공사업이겠어요.” 청계천 을지로 보존연대 박은선 활동가는 지적했다.


사람이 머무는 공간이 오로지 ‘재산 증식’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도시 서울.

포클레인은 이 공간의 역사와 유구한 이야기를 오늘도 끊어내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한 도심 제조업 지대가, 어디서나 흔한 ‘빌딩 숲’으로 바뀌는 사이, 서울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근본 없이’ 납작한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박지윤 기자
전윤재 인턴기자
서현희 인턴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