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0일 결혼한 울산 동구의 김혜주(28)씨는 신혼여행지로 제주도를 택했다. 애초 프랑스 파리·스위스로 여행 준비를 모두 마쳤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예식 한 달 전 출국을 포기했다. 하지만 기대 없이 떠난 제주도 여행은 "신의 한 수"가 됐다. 그는 "코로나19로 결혼 준비도 큰 영향을 받고 예식 치르면서 마음 고생이 심했다"라며 "유럽을 갔으면 일정이 빡빡해 스트레스가 계속됐을 것 같은데 제주도는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하고 부담없이 푹 쉴 수 있었다"고 했다.
코로나19로 출국 기회가 없어져 해외를 가지 못한 신혼부부들이 으뜸으로 택한 곳은 제주도였다. 코로나19 확진자가 크게 늘었던 3월 내국인 여행객 수가 지난해 대비 54% 급감(47만 7,176명)했던 제주도는 4월부터 54만 1,099명, 5월 76만 5,616명, 6월 86만 528명, 7월 98만 8,094명, 8월 112만 6,842명으로 회복해 왔다. 9월엔 코로나19 재확산 영향으로 여행객 수가 주춤했으나, 온라인 웨딩카페 등에는 올겨울이나 내년 신혼여행으로 제주도를 준비 중인 예비부부의 문의글이 이어지고 있다.
비록 해외여행은 물거품이 됐고 코로나19는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은 채 감염자 수가 늘고 있지만, 새로운 시작을 앞둔 신혼부부들은 제주도를 여행하는 동안 오롯이 서로만 바라보며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평생 한 번 있을까말까 한 장기 휴가인 만큼 신혼부부들은 특별한 추억을 위해 '제주도 한 달 살기'나 자전거 여행, 부모님 과거 신혼여행 사진 따라 찍기 등 다채로운 활동을 계획했다. 일부는 성산 일출봉, 천지연 폭포 등 잘 알려진 관광지 대신 인적이 드문 장소를 찾거나 차를 타고가다 아무데나 멈춘 뒤 경치보며 여유 있는 시간을 즐기기도 했다.
김씨는 이번 여행에서 전원생활을 즐기는 영화 '리틀포레스트'의 주인공처럼 아날로그 감성을 살려봤다. 스마트폰을 멀리하고, 관광보다 산책과 사색을 즐기고, 맛집 방문 대신 현지에서 구한 식재료로 직접 요리하며 '제주도 살아보기'를 해 본 것이다.
김씨는 "일부러 어디를 갈지 정하지 않았다"며 "코로나19로 결혼식도 뒤죽박죽된 상황이라 계획 짤 여유도 없었을 뿐더러 자칫 국내 여행마저 못 갈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괜한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서울 서대문구에 사는 이은옥(36)씨도 "코로나19로 결혼식을 미룰까 고민을 많이 해서지인들이 축하보다 위로를 해주더라"며 "원래 여행 가기전 계획표를 꼼꼼하게 짜는 편인데 또 변수가 생길까 두려워 이번엔 무(無) 계획으로 다녀왔다"고 전했다.
7월 4일 제주도를 찾은 이씨는 여느 여행객이 찾아갈 관광지를 일부러 피해다녔다. 유명 한 곳은 이미 가봤을 뿐더러, 코로나19 때문에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을 찾기 부담스러웠다.
대신 '천연 캔들 만들기' 공방과 개인방으로 운영되는 편백 효소 찜질방 등을 갔다. 식당도 여느 때처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정보를 참고하지 않고 마음 내키는대로 찾았다. 제주도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해보기 위해서였다.
효소 찜질방은 특히 동네 주민들만 즐겨 찾는 곳이라 신기해 하는 시선이 많았다고 한다. "허름한 찜질방이었는데 동네 주민들이 '육지에 사는 신혼부부가 여길 어떻게 알고 왔냐'고 재밌어하시더라고요. '이 시국에 결혼하느라 고생했다'고 다독여 주시고요."
친지에게 보낼 감사 선물은 따질 것 없이 귤이었다. 이씨는 "신혼여행 왔다니까 주인이 '코로나19에 결혼하느라 고생했다'면서 귤을 한 봉지 더 챙겨줬다"며 "식당 등 가는 곳마다 우리 부부를 위로하며 서비스를 주시더고"고 말했다. 그는 "그 응원의 힘으로 뜻 깊은 여행을 했다"고도 했다.
김씨도 제주도 신혼여행을 '익숙함 속에서 새로움을 찾는데' 초점을 맞췄다. 전에는 제주도를 오면 바닷가 관광지를 주로 다녔지만, 이번엔 평소 갈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섬 안 쪽 곳곳을 탐방했다.
그러다 보니 나만 알고 싶은, 남한테 절대 알려주고 싶지 않은 장소도 발견했다. 제주시 교천읍 교래리의 '삼다수목장' 인근 숙박시설이었다. "제주하면 푸른 바다만 떠올렸는데 목장이 있는 그 동네는 또 다른 분위기더라고요. 창문 밖으로 푸른 목장 풍경이 펼쳐지는데 다른 나라에 온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어요."
해외여행에 쓸 비용을 아끼게 되면서 제주도에서 해외 호텔 부럽지 않은 럭셔리 한 휴가를 즐긴 신혼부부도 있었다. 6월 초 제주도를 찾은 왕수진(가명·33)씨는 동남아 호텔 분위기가 풍기는 풀빌라와 호텔 위주로 호캉스를 즐겼다. 밤에 자쿠지 안에서 달을 보며 반신욕을 하고, 프라이빗 풀장에서 남편과 물놀이를 하고, 호텔 앞 해변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와인을 마시며 낭만의 시간을 보냈다.
왕씨는 "코로나19 예방 차원에서 최대한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으려고 호텔의 서비스를 많이 활용했다"면서 "비록 국내였지만 이국적 분위기에서 단 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실제로 제주도 호텔들은 이 같은 수요를 반영해 최근 신혼부부를 겨냥한 '허니문' 상품을 쏟아내고 있다. 제주신라호텔은 2013년 이후 약 7년 만인 3월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한 '허니문 패키지' 상품을 내놨다. 9월부터 11월까지는 호텔에서 웨딩기념 촬영을 하고 사진첩을 만들어주는 '숨비포토'와 커플스파 서비스 등이 있는 패키지 상품도 예약 가능하다.
해비치 호텔앤드리조트 제주는 요트 투어와 피크닉 세트를 제공하는 '프라이빗 요트' 패키지를 10월까지, 고급 차량 대여와 수영장 서비스를 제공하는 '로맨틱 허니문' 패키지를 12월까지 제공한다.
울며 겨자먹기로 떠난 제주도 여행이지만, 신혼부부들은 대체로 만족스러워 했다. 김씨는 "지인들은 해외를 못 가서 어쩌냐며 안타까워하지만 나는 다시 신혼여행을 가면 또 제주도를 택할 것 같아요"라고 했다. "결혼 준비에 지친 상태로 해외에 가서 힘을 빼는 것보다 편하잖아요. 낯선 곳이라는 두려움도 없고 안전하고요. 오로지 둘에게만 집중할 수 있고 결혼을 준비하면서 느꼈던 생각들과 감정도 정리할 수 있고요."
제주도에 다녀온 이씨는 남편과 모처럼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씨는 "대단한 일정이 없어서 남편과 대화를 많이 했다. 결혼식 뒷얘기와 자녀 계획까지 정리했다"며 "화려한 무언가를 한 건 없지만 내가 갔던 여행 중에 제일 알찼다"고 했다.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다녀 온 부부들에게는 가장 낭만적인 추억을 안겨 준 곳은 어디일까. 이들이 추천하는 곳은 뜻밖에 화려하거나, 유명하지 않았다.
김씨는 수많은 오름 중에서도 한림읍 금악리의 '금오름'을 꼽았다. 남북으로 두 개의 봉우리가 있고 동서로는 움푹 들어간 원형 분화구가 있는 금오름은 분화구 가운데 산정호수를 품고 있는데, 그 전경이 백미란다. 김씨는 "JTBC '효리네 민박'에서 공개돼 화제가 됐지만,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다더라"며 "가는 길이 조금 힘들기는 하지만 올라가면 눈 앞에 장관이 펼치지니 그 보상이 충분히 된다"고 했다.
왕씨는 애월해안도로 드라이브를 추천했다. 애월읍 하귀리에서 애월리까지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인데, 제주도에 있는 해안도로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구비구비 도로를 달리다 보면 해안 절벽과 푸른 바다를 여러 각도로 감상할 수 있다. 왕씨는 "그 날따라 노을지는 하늘이 예뻐서 오픈카를 타고 영화 '라라랜드' 배경 음악(OST)을 들으며 해안도로를 달렸다"며 "지금까지 잊을 수 없는 순간"이라고 회상했다.
이씨는 코로나19 시대에 예식을 치르느라 고생했을 신혼부부를 위해 피로를 풀어줄 수 있는 편백효소 찜질을 추천했다. 편백나무 톱밥과 각종 한약재에 미생물을 발효시켜 온몸에 덮고 누워 있으면 자연 발효열로 체온이 올라간다. 몸 안의 독소를 배출시키면서 예식 내내 긴장하느라 뭉친 근육이 풀렸다고 한다. 신혼부부 두 사람만 별도 방에서 이용할 수 있어 코로나19 감염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제주도에는 효소찜질방이 여러 곳 있는데, 통상 1만 3,000원~3만 5,000원 정도의 비용으로 체험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