삥땅과 경제학

입력
2020.08.2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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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삥땅’이라는 속어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할 돈의 일부를 중간에서 가로채는 것을 말한다. 1980년대까지는 특정 직업에 한정된 말이었다. 버스 안내양이 손님들에게서 받은 요금을 몰래 빼돌릴 때 ‘삥땅친다’고 했다.

그 시절 버스가 종점에 도착하면 ‘삥땅’을 조사한다며 고참 직원이 안내양들의 몸을 수색했다. 돈이 적을 때는 속옷차림으로 세워 놓고 중년의 남성이 더듬기도 했다. 그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는 어린 안내양들은 자살로써 항변했다. 이런 부조리를 다룬 것이 '도시로 간 처녀'라는 영화다.

1981년 개봉된 그 영화는 유지인, 금보라 등 당대의 톱스타가 주연을 맡았다. ‘삥땅’과 알몸수색 등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용감하게 건드려서 큰 상도 받았다. 그러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자신들을 좀도둑으로 취급했다면서 버스 안내양들이 상영중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서슬이 시퍼런 전두환 정부도 그들의 분노에 찬 절규는 진압하지 못했다. 영화는 조기 종영되었다.

직업에 대한 편견은 어디나 있다. 예를 들어 경제학자는 이해타산만 따지는 냉혈한으로 취급된다. 거기서 나온 우스갯소리가 있다. 경제학자들이 자식을 내다 팔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자식한테 얻는 미래가치가 현재 시장가격보다 크리라는 ‘합리적 기대’ 때문이라는 것이다.

편견은 고정관념을 부른다. 미국의 어느 의학 학술지에 “비키니 입은 사진을 SNS에 올리는 여의사들은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논문이 게재되자 여의사들이 화가 났다. 너도나도 비키니 입은 사진을 SNS에 올리고, 고정관념에 항의했다.

복장에 관한 고정관념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여성 국회의원이 발랄한 원피스를 입고 의사당에 나타나자 입씨름이 벌어졌다. 국회의원은 항상 근엄한 복장을 갖추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일으킨 논쟁이다.

법무장관이 “소설 쓰시네”라고 말한 것을 두고도 시비가 붙었다. 소설가를 거짓말쟁이로 취급했다면서 소설가협회가 장관의 공개사과를 요구했다. 소설가에 대한 편견이 억울하다는 항변이다. ‘삥땅’치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편견이 억울하다던 버스 안내양들의 항변이 떠오른다.

‘삥땅’이란 말에는 사연이 많다. 포르투갈어 삔따(pinta)는 점(點)을 의미하는데, 일본인들은 그 말을 줄인 ‘삔’을 숫자 1이라는 뜻으로 썼다. ‘삔토루(ピン取る)’는 금액의 1할(10%)을 가로챈다는 일본 속어이고, 그 발음을 흉내 낸 것이 ‘삥땅’이다(삔따>삔>삔토루>삥땅).

소설도 좋은 뜻은 아니다. 사소하고 자잘한 이야기 즉, 잔총소어(殘叢小語)라는 의미다. 소설은 탄설(誕說)이나 공담(空談)으로도 불렀는데, 이는 꾸며낸 말이거나 허튼소리라는 뜻이다. 공식 역사를 다루는 사관과 달리 항간의 유언비어를 다루는 패관의 글이라는 뜻으로 패설(稗說)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므로 “소설 쓴다”는 표현이 좋은 뜻을 가질 리 없다.

이렇게 천시되어 왔던 소설에 광명을 비춘 것은 청나라 말 계몽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다. 그는 소설이 근대시민사회에 어울리는 훌륭한 문학 장르라고 찬양했다. 서양의 소설(novel)은, 영웅담 위주의 귀족문학을 탈피하여 평범한 사람들의 현실성 있는 이야기를 다루는 새로운(novus) 장르라는 뜻임을 일깨웠다.

량치차오가 소설은 제대로 봤지만, 경제학은 잘못 봤다. 그는 경제학을 자생학(資生學)이라고 번역했다. 자산을 키우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경제학을 개인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그 무렵 다른 학자들도 경제학을 이재학(理財學)이나 계학(計學)으로 불렀다.

시대가 말을 만든다. 뜻도 바꾼다. 버스 안내양이 사라지면서 ‘삥땅’의 뜻이 변했다. 오늘날 소설을 ‘꾸며낸 허튼소리’라고 보는 사람은 없다. 이제는 대설(大說)이 적절한 이름이다.

경제학도 시대의 영향을 받는다. 자생학, 이재학, 계학은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번역한 ‘경제학’으로 통일되었다. 일본은 그 학문의 본질을 국가경영과 백성구제(經世濟民)에 두었다. 중국에 비해서 국가가 크게 강조된다.

그런데 요즘에는 서양에서도 경제학이 개인의 재산증식과 숫자놀음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경제학에서 국가를 삥땅 치면, 자생학이나 이재학, 계학으로 환원되리라.


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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