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을 앗아간 정부

입력
2020.08.21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지난달 고교 동창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친구는 안부 인사도 뒤로 한 채 정부의 부동산 대책에 대한 비난부터 쏟아냈다. 자신은 단기 주택임대사업자인데, 이번 7ㆍ10 부동산 대책으로 그간 주어진 권리를 순식간에 빼앗겼다고 항변했다. 친구는 4년의 기간을 모두 채우면 장기 임대사업자로 전환하려고 했기에 이를 폐지한 이번 대책이 무척 서운했을 수 있다.

그러나 친구를 정말 힘들게 한 것은, 정부가 예측 불가능한 삶을 살도록 했다는 일종의 배신감에 있었다. 모조리 소급 적용해 기존 원칙을 철저히 외면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더 이상 계획적인 삶은 무의미해졌다고 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법안 통과도 없이 대책 발표 다음 날부터 관련 내용을 곧바로 적용한다고 한 발언도 꼬집었다. 국회의 법안 개정 과정에서 각계각층의 의견이 반영되며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런 절차를 무시하고 “내 말이 곧 법이다”는 식으로 밀어붙였다는 주장이었다.

통화가 끝난 후 한 달이 흘렀다. 정부는 하루가 멀다고 기존 대책을 보완하는 땜질 처방을 내놓고 있다. 논란이 커지자 단기 임대사업자의 권리는 일부 유지하기로 했다. 1주택자 재산세 감면 추진 등 급조한 대책임을 인정하듯 수정 보완책도 이어지고 있다.

예상대로 시장에서 논란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있다. 집주인과 세입자는 서로 불쾌한 목소리를 내며 편 가르기를 하고 있고, 서울 전셋값은 연중 최고치를 갱신하고 있다. 집값도 떨어지지 않고 있다. 무주택자들은 평생 내 집을 갖지 말라는 의미냐며 역시 불만을 표출한다.

정부는 이런 상황인데도 한술 더 떠 현재 4% 수준인 법정 전ㆍ월세 전환율을 시대에 맞게 조정한다고 나섰다. 집주인들은 “최소한의 이익도 보장하지 않는다”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우려에도 광화문광장으로 향했다.

이런 혼란이 발생한 1차적 책임은 먼저 원칙을 깬 정부에게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경기장 안에서 규칙을 준수해야 하는 협회와 심판이 일방적으로 경기 중 규칙을 변경한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잘못된 룰이라도 공정한 조정 과정을 거친 후, 다음 경기 또는 리그부터 적용해야 외면받지 않기 마련이다.

정부 주장처럼 다주택자 또는 주택임대사업자가 집값 상승의 원흉이라 하더라도 약속한 기간까지 주어진 권리는 보장해야 한다. 그게 현 상황과 맞지 않고 공익을 저버려 개선이 절실하다고 해도, 누구 누구의 정부가 아닌 대한민국 공무원과 국회의원이 만든 룰이다.

또 시대에 맞게 법을 개정해야 한다면 공평하게 해야 한다. 예컨대 전ㆍ월세 전환율을 손댄 것처럼, 호화주택 기준인 9억원도 시대에 맞춰 높여야 한다. 이미 서울지역 아파트 중위가격은 9억원을 돌파(KB국민은행 집계 기준)했다. 12년 전 설정한 기준을 조정해야 할 시점이 됐다. 시대변화라는 잣대를 부동산 관련 법안에 일관되게 적용하는 것은 정책입안자의 의무이기도 하다.

정책을 누더기로 만드는 것은 실패를 자인하는 꼴이다. 자랑스런 K시리즈를 만든 선진국에선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후진국에서나 벌어질 일이다. “언론의 역할인 파수꾼 활동을 제대로 해, 계획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친구의 하소연이 오늘도 귓가를 맴도는 이유다.

박관규 산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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