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오취리는 다시 거울이 됐다

입력
2020.08.2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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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가르칠 때 ‘열 꼬마 인디언’ 노래는 이용하지 마세요. 한국어 교육 모의 수업을 하는 실습생들에게 매 학기 하는 소리다. 실습생들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도 그런 눈으로 선배 교사를 쳐다본 적이 있었다. 학생들이 이미 알고 있는 노래로 한국어 숫자를 가르치면 효율적이지 않나요? 기다렸다는 듯 선배 교사가 대답했다. 옛날에는 그 노래로 수업을 했었는데요, 어떤 학생이 강력하게 항의를 했대요. 끔찍한 인종차별이 숨겨져 있는 노래라고. 백인들이 인디언 아이들을 한 명씩 학살하면서 불렀던 노래라나. 도시 괴담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으나 해당 노래를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학생이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고, 그런 이유로 내가 한국어를 가르치던 기관에서는 이 노래가 암묵적인 금지곡이 되었다.

최근에 이 노래에 대한 여러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은 이렇다. 본래 이 곡은 영국에서 ‘열 꼬마 검둥이’라는 제목으로 불리던 노래다. 노래 속에서는 실제로 흑인 소년들이 하나씩 죽어 나간다. 그 내용에 영감을 받아 애거서 크리스티가 쓴 소설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인데, 이 소설의 원제는 ‘Ten Little Niggers’이다. 이 노래는 미국으로 건너가 블랙페이스 분장으로 유명한 민스트럴 쇼에서 ‘열 꼬마 인디언’으로 변형되어 불렸다.(여전히 소년들은 죽어 나갔고, 여전히 노래는 흥겨웠다) 이 민스트럴 쇼에 블랙페이스 분장을 하고 나오는 대표적인 캐릭터가 ‘짐 크로’이다. 맞다. 그 짐 크로. 미국의 악명 높은 흑백 분리 정책들을 통칭하는 법의 이름. 블랙페이스 분장을 한 그 법의 이름 아래 수많은 흑인들이 고통받고 희생당했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간 건 사과... 이런 식으로 설명했으니 이제는 알 것이다. 왜 흑인들이 블랙페이스에 그토록 민감한지를. 블랙페이스가 단순히 재미있자고 하는 분장이 아니라는 것을. 블랙페이스는 피로 물든 인종차별의 역사를 가리키는 기호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아무리 자의적이라고 한들, 검은색으로 칠한 얼굴에 ‘비하의 의도가 없는 패러디’라는 의미를 마음대로 갖다 붙일 수는 없다.




샘 오취리의 의정부고 학생 비판으로 시작된 블랙페이스 논란의 쟁점은 학생들의 분장이 인종차별인가 아닌가에서 샘 오취리의 말과 행동으로 옮아간 것처럼 보인다. 그가 이중적이며, 말과 행동이 부적절하다며 온갖 비난이 쏟아진다. 이런 비난을 통해 얻고자 하는 효과는 이것이다. 지금 당장 침묵할 것. 그저 침묵할 것. 말하고 싶다면 웃기는 광대로서 말하고 진지한 이야기는 하지 말 것. 이것도 인종차별이냐고? 대답은 연구자들의 설명으로 대신할까 한다. 현대의 인종 차별은 소수자를 노골적으로 비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신 차별 받는 소수자의 부정적인 부분을 반복해서 부각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흑인의 생명이 중요하다고 말할 때, 왜 흑인들은 방화하고 약탈하는지를 묻는 식이다. 미묘하고, 세련됐으며, 차별을 행하는 이들에게는 자신이 정의로운 일을 행하고 있다는 믿음까지 준다.

그러니까 이 논란의 초점은 그가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행동했느냐가 아니다. 문제는 ‘누가 말 할 자격이 있느냐’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한국 사회의 공론장에서 흑인은 말 할 자격이 없다. 공적 담론이 오가는 이 광장에 흑인은 ‘출입불가’다. 이는 흑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외국인에게도 적용된다. 연구서 ‘한국 사회의 인종차별적 담화구조’(이창수)에 따르면 한국 언론은 외국인을 외부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존재이자, 타인의 행동에 영향을 받는 수동적인 존재로 그린다. 예를 들어 한국의 뉴스에서 외국인들은 발화자가 아니라, 발화의 내용으로만 등장한다. 이 땅에는 250만 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살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입이 없는 셈이다.

방송에 출연하는 수많은 외국인들은 뭐냐고?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거울로 기능한다. 있는 그대로를 비추는 거울은 아니다. 그들은 한국 방송계에 확고하게 뿌리내린 ‘거울아 거울아(이 세상에서 어느 나라가 제일 아름답니?)’ 예능 장르의 사업장에서 근무한다. 거울아 거울아 연예 산업의 목표는 한국 사회의 긍정적인 자아상을 비추고 증폭시켜 한국인들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물론 아무나 이 연예 산업에 종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일을 하려면 백인(미주나 서유럽 출신 대환영)인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백인이 아닌 이들에게도 기회가 오지만 이 경우에는 그들이 백인만큼이나 특별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꼬리표가 필요하다. 샘 오취리의 경우 방송 출연 초기에 미국 할리우드 스타 윌 스미스의 닮은꼴로 소개되었고, 이후에는 가나의 명문가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이 산업의 종사자들은 말할 수 있되, 수동적인 대상, 거울로서의 말만 할 수 있다. 물론, 예외적으로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이고 진지한 발언이 허용되는 종사자들이 있다. 이 일은 부자 나라에서 온 백인(엘리트)들에게 맡겨진다. 그들이 말하면 한국 사회는 겸허히 듣는다. 그러나 이런 진지함은 가난한 나라에서 온 흑인인 샘 오취리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일이다.

2017년, 한 개그 프로그램에서 일어났던 블랙페이스 사건을 상기해보자. 오취리는 그때도 유사한 비판을 했고, 언론과 대중은 그 비판을 긍정하는 분위기였다. 지금과 뭐가 다르냐고? 그때는 샘 해밍턴이 있었다. 샘 해밍턴의 비판이 먼저 있었고, 오취리가 뒤를 이었다. 두 사람의 발언은 ‘해밍턴이 이렇게 말했는데 오취리도 그렇게 얘기했다’라는 식으로 함께 묶여서 유통됐다. 그러니까 오취리의 말은 해밍턴의 말에 ‘덧붙여진’ 것이었다. 말하자면 오취리는 광장에 혼자 입장한 것이 아니다. 그의 광장 입장은 샘 해밍턴이라는 백인의 승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020년, 3년 전과 정반대로 가는 논란은 흑인이 당사자인 ‘블랙페이스’ 문제조차 백인의 ‘승인’이 필요함을 보여 준다. 무엇보다도 이 소란은 한국 사회의 공론장 안에 짐 크로 법이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비난 댓글과 오취리의 사과문에 동시에 등장하는 ‘선을 넘었다’는 표현은 그 법이 존재한다는 증거다. 한국 사회의 시혜를 받는 주제에 오취리는 자신의 본분을 잊었다. 그리고 감히 부유한 국가의 백인에게 부여된 영역과 신성불가침인 한국인의 영역에 그어진 두 개의 선을 ‘홀로’ 넘었다. 그렇게 선을 넘은 그가 한국인들의 진짜 모습을 보여 주자, 한국인들은 거울이 배신했다고 분노하며 그 거울을 깨버리려 했다. 그는 본래 거울이 아니었고, 그래서 자신의 말을 했을 뿐인데 말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기어코 샘 오취리를 침묵시켰고, 그를 다시 거울로 만들었다.

이제 승리에 취한 이들은 열 꼬마 인디언 노래처럼 이 광장에서 소수자의 목소리를 하나씩 사라지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아홉이 남고, 여덟이 남고… 둘이 남고, 하나가 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 광장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백승주 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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