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도시의 유리창이 출렁거릴 만큼 커다란 폭발이 있었다. 200여명이 죽고 7,000명 넘게 다친 베이루트 최악의 참사지만, 보름 남짓한 시간 동안 우리에겐 이미 지난 뉴스가 되었다. 청소기를 집어던지고 아이를 들쳐 업은 유모, 아비규환 속에서 신생아를 품에 꼭 끌어안은 간호사, 흰색의 웨딩드레스와 함께 순식간에 떠밀려간 신부. 폭발 순간에 남은 몇몇의 장면들만 드라마틱한 영화처럼 사람들을 스쳐갔다. 타인의 크나큰 슬픔은 내 발끝의 고통보다도 쉽게 잊히기 마련이고, 많은 이에게 레바논은 어디에 있는지 짐작조차 안 갈 만큼 멀고 먼 나라다.
폭발의 원인인 질산암모늄 2,750톤이 쌓여 있었다는 바로 그 항구 근처에는 베이루트에서 가장 싸면서도 푸짐한 샌드위치 가게가 있었다. 원하는 대로 재료를 꾹꾹 채워 주는 큼직한 샌드위치는 늘 허기진 여행자에게도, 가까이에서 일하는 부두 노동자에게도 인기였다. 진열대 뒤에서 샌드위치를 둘둘 말아 내밀던 할아버지는 생존용 아랍어로 외워둔 ‘슈크란(고맙습니다)’ 한마디에 환하게 웃어 주었다. 취미 때문에 알게 된 베이루트의 친구들은 무심코 나온 ‘슈크란’ 에 피식 웃으며 “메르시!” 라고 답하곤 했다. 그들은 아랍어 대신 불어를 주로 쓰는 마론파 기독교도였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지배 끝에 교묘한 인구구성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국가였고,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도에서, 총리는 이슬람교 수니파에서, 국회의장은 이슬람교 시아파에서 나와야 한다고 미리 자격이 정해져 있다니. 참 복잡하고 다사다난한 레바논이다.
항구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구도심인 제마이제 지역이다. 얼마 전 나사(NASA)가 폭발로 파괴된 지역을 붉게 표시한 위성사진을 공개했는데, 온통 내가 걷던 길이다. 예술가들이 모여 드는 아지트이자 베이루트 밤 문화의 중심지였던 그 골목에는 집을 나선 지 6개월째라 삐죽삐죽 지저분해진 머리를 맡긴 미용실도 있었다. 아마도 처음 받아봤을 동양인 손님, 가위 대신 낫자루 모양의 면도칼을 들고 있던 주인장의 긴장한 표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숭덩숭덩 머리카락을 썰어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툭툭 떨어지는 털 무더기에 뒤통수는 금세 가벼워졌다. 등까지 늘어지던 머리카락을 귀 밑으로 잘라내고는 나풀나풀 구름이라도 머리에 인 양 걸으며 인사했던 그 길의 사람들은 폭발의 순간에도 거기에 있었을까?
아침부터 자정까지 끊임없이 ‘웰컴’을 외쳐대던 그 골목 식당의 매니저 아저씨도 무사히 피했을지 걱정이다. 엄청나게 밀려드는 사람에도 불구하고 하나하나 정성껏 메뉴를 설명해 주고 어제 먹은 음식까지 다 기억해 준 그였는데. 늦은 점심인지 이른 저녁인지 작은 그릇에 담은 콩죽과 빵 몇 쪽으로 허겁지겁 끼니를 때우면서도 언제나 시선은 손님 테이블로 향해 있던 그의 모습이 아직 짠한 기억으로 남았는데 말이다. 급한 생계 대책에 밀리다 보니 무용지물이라는 말을 참 많이 듣는 ‘여행’이다. 하지만 여행이란, 몇 천명의 사상자도 그저 숫자로만 들리는 먼 나라 뉴스에 가슴 아프고 눈에 밟히는 이들을 새겨 놓는 것이다. 난 유난히도 붉게 물들었던 베이루트의 저녁 하늘을 내내 잊지 못한다. 짙푸른 지중해와 하얀 설산을 모두 가진 축복받은 땅에서, 그때의 하늘처럼 붉고 선명한 피눈물이 내가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에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