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통근길도 못 견뎠던 제가 어떻게 혼자 산을 다니냐고 신기해해요."
4년차 간호사인 김지미(27·이하 가명)씨는 올해 초부터 산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스케줄 근무를 하는 김씨는 불규칙한 생활 방식에 지쳤다는데요. 남이 일하는 시간에 쉬고, 쉬는 시간에 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죠. 주말 약속도 쉽게 잡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스트레스 지수는 더 높아졌다고 합니다.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김씨는 언제, 어떤 환자가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긴장해 있었다고 하는데요. 환자가 병원에 진입하기 전에 열을 재고 호흡기 증상 유무를 면대면으로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죠. 가끔 선별 진료를 하는 경우엔 두꺼운 방호복을 입고 돌아다녀야 해서 일 끝날 때쯤엔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됐습니다. 그렇게 밤낮없이 일하다가 쉬는 날에는 녹초가 되어 집에 늘어져 있어야만 했죠.
체력이 부족해지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지만 김씨는 코로나19 감염 걱정이 돼 쉽사리 운동을 시작할 수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택한 것이 등산이었습니다. 요가나 스피닝처럼 밀폐된 곳에서 운동을 한다면 감염의 위험에서 자유로울 순 없겠죠. 대신 등산은 사람들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움직일 수 있는데다가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맞춰 갈 수 있기 때문에 스케줄 근무를 하는 김씨에게는 딱 맞는 운동이었습니다.
시작은 동네 뒷산 오르기였습니다. 27년 인생에서 산이라곤 어렸을 적 아버지를 따라 약수터에 간 것이 전부였던 그는 높은 곳은 도전할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김씨는 “처음엔 해발 300m 안팎인 뒷산 불곡산 중반에서도 중도하차 했다”며 “준비가 미숙해 반바지를 입고 올랐다가 벌레에 물리고 나방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말 그대로 김씨는 등린이 중에서도 막 걸음마를 뗀 수준인 ‘0단계’에 속했던 겁니다. 등린이란 등산과 어린이를 합친 말인데요. 등산을 처음 시작하는 2030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진 신조어입니다. 이 오르막길이 언제 끝나려나 지도 애플리케이션(앱)만 보고 걷다가 넘어질 뻔한 적도 많았다고 합니다. 김씨는 “마스크 때문에 지치고 끝이 안 보이는 계단 때문에 좌절도 많이 했지만, 오르막이 끝나면 정상이 나오는 것을 아니까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김씨는 ‘도장깨기’ 식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시키거나 내기를 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혼자 산을 다니다 보니 정보를 얻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요. 지도 앱을 보고 지역을 정한 뒤 그날 오를 산을 정한다고 합니다. 검색 사이트 블로그에서 초보를 위한 등산 코스를 찾고, 등산 후기까지 꼭 읽었고요. 등린이었던 그는 인왕산, 예봉산, 대모산, 청계산, 관악산, 불암산을 비롯해 총 16곳을 차근차근 섭렵했습니다.
지난달 31일에는 혼자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죠. 등린이 시절을 거치며 ‘언젠간 한라산 꼭대기에 오르고 싶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이날 김씨가 택한 코스는 관음사를 지나 백록담을 찍고, 사라오름과 성판악으로 내려오는 길입니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인데도 새벽부터 등산화 끈을 여미던 김씨. “한라산 가지 말앙. 바당이나 가주. 내일가믄 붙잡잰 햄서.”라는 옆집 할머니는 만류했습니다. 죽을지도 모르는 데 왜 가냐는 말에도 김씨는 개의치 않았죠.
할머니의 걱정을 뒤로 한채 김씨는 택시를 타고 집을 나섰습니다. 이미 수도권의 웬만한 산을 완등한 김씨에게는 더 이상 등린이가 아닌 전문 산악인의 포스가 났습니다. 준비도 누구보다 철저히 했다는데요. 등산스틱과 등산화는 기본. 현무암 길이 많아 물집이 잡힐 수도 있기 때문에 종아리 반까지 오는 두꺼운 양말도 장착했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길, 쉬고 싶지는 않았을까요. 물론 그 동안 올랐던 산은 언덕으로 느껴질 만큼 힘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탄탄하고 긴 레깅스 바지를 입고 올라간 덕분에 힘들면 딱딱한 돌 위에 털썩 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라면용 뜨거운 물, 차가운 물 1리터와 단백질 바 2개, 토마토 2개, 컵라면, 직접 싼 주먹밥까지 챙겨가 중간중간 배도 든든히 채웠고요. 혼자 올라가다 다칠 수도 있으니 비상용 밴드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호신용 호루라기도 꼭 챙겼습니다.
총 7시간 15분의 여정을 마치고, 등린이 0단계에서 시작했던 그는 이제 '프로 등산러'로 거듭났습니다. 김씨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산 정상에 오른 사진이 올라오고, 그를 응원하는 지인들의 댓글이 달립니다. 동료 간호사들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몸이 탄탄해지고 혈색이 좋아지는 김씨를 보며 부러워한다고 합니다.
김씨 본인의 마음가짐도 달라졌습니다. 등산을 마음먹었던 건 3교대로 바쁘게 돌아가는 근무 여건과 갈수록 심각해지는 코로나19로 몸도 마음도 지쳤기 때문이었는데요. 등산 시작 후 6개월 만에 프로 등산러가 된 그는 이전보다 좀 더 활기차게 병원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김씨는 “정신력은 체력에서 온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며 “이 모든 건 등산의 힘”이라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김씨의 다음 목표는 어딜까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한라산까지 완등했으니 이제 산 하나 가지곤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은데요. 김씨는 “이제 하루에 산 하나를 오르는 건 웬만큼 해봤으니 700m 이상 산 2개를 하루 안에 종주해보는 것이 목표”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젊은층의 등산 사랑은 비단 김씨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SNS에 산 이름을 검색하면 해시 태그와 함께 등산 인증샷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치 SNS 핫 플레이스 카페에 간 것처럼 말이죠. 요즘 떠오르는 곳은 북한산 백운대입니다. 백운대 정상에 꽂힌 태극기와 함께 서울 전경과 뒷모습을 함께 담는 겁니다.
하지만 북한산도 절대 호락호락한 곳은 아닙니다. 기초 체력이 아예 부족하다면 북한산도 무리일 겁니다. 북한산보다 난이도가 낮은 청계산, 인왕산도 많이 찾는다고 하는데요. 인왕산에 직접 찾아가 산을 오르는 2030들을 만나 봤습니다.
해가 꺾일 시간대인 오후 6시. '야간 산행은 무리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그 시간에 인왕산을 오르기 시작하는 등산객들이 보였습니다. 인왕산 입구의 호랑이 동상 앞에서 만난 김소현(26)씨는 고등학교 동창과 함께 왔다고 하는데요. "인스타그램에서 보니까 인왕산이 초보자가 오르기 쉬운 산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오르기 제일 쉬울 것 같아 와봤다"고 덧붙였습니다.
자신만만한 김씨의 모습에 ‘올라볼 법한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산하는 등산객 가운데는 미취학 아동처럼 보이는 남자아이도 폴짝폴짝 뛰어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등린이었던 기자들은 평소 버스를 잡기 위해 전력질주하던 출근길을 떠올리며 근거 없는 자신감에 불탔습니다. 하지만 큰 착각이었습니다.
인왕산은 등산로 중에서도 난이도가 있다는 돌산이었고, 기자들은 등린이도 아닌 신생아 수준의 체력을 갖고 있었죠. 그것도 산 중턱에 다다라서야 깨달았던 겁니다. 더 나아가지도,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는 상황. 함께 동행한 이들에게 거의 업혀 가며 겨우 정상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남들은 1시간 반이면 거뜬히 오른다는 코스를 3시간에 걸쳐 오를 만큼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힘겹게 오른 정상. 그곳에서 만난 등산객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그곳에 왔다고 했습니다. 우상혁(32)씨와 박수진(29)씨는 데이트 장소로 산을 택했습니다. 우씨는 "코로나19 때문에 실내 데이트할 곳이 없으니 산을 찾게 된다"며 "낮에는 너무 더우니까 해가 질 때쯤 오르는 야간 산행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손태경(34)씨는 “같은 동네 사는 친한 동생들과 산에 와 봤다”며 “등산하고 먹는 술과 안주만의 맛이 있어 굳이 여기까지 왔다”고 귀띔했습니다.
그런데 셔츠에 청바지 또는 면바지 차림으로 인왕산에 오르던 기자들의 눈에 띈 건 바로 레깅스였습니다. 레깅스는 신축성 있는 소재로 만들어진 달라붙는 하의로 일명 ‘쫄바지’라고도 불립니다. 보통 요가나 필라테스처럼 체형을 확인해야 하는 운동을 할 때 입습니다.
하지만 일반 트레이닝복보다 잘 늘어나고 활동성이 좋아 사이클이나 산행처럼 격한 운동을 할 때도 레깅스를 선호하는 추세죠. 그 덕에 덩달아 레깅스가 하나의 패션처럼 등산객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는데요. 한 인터넷 이커머스 통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20대 등산용품 구매량이 전년 동기 대비 87% 늘었다고 합니다. 여성 등산 의류 판매량 역시 103% 급증했고요.
실제로 지난달 청계산 입구에서 만난 대다수의 2030 등산객들도 레깅스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최예나(26)씨와 김유빈(26)씨 역시 레깅스 차림이었는데요. 등산할 때마다 레깅스를 입었다는 최씨는 “산에 오르려면 긴 바지를 입어야 하는데 통이 넓으면 돌멩이 같은 것들이 들어갈 때도 있다”며 “신축성이 좋아 산에 오를 때 다리 전체를 꽉 잡아주는 느낌”이라고 덧붙였습니다.
SNS의 유행도 한몫하는 듯합니다. 부부 동반으로 산에 오른 김모(29)씨 역시 레깅스를 “편한 복장”이라고 하면서도, “SNS에 올릴 때 운동을 열심히 해서 탄탄한 몸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레깅스로 몸매를 드러내는 것 같다”고 귀띔했습니다.
패션과 편의성 모두를 잡을 수 있다는 레깅스. 하지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등산객도 있었습니다.
공주현(27)씨는 “사진에 잘 나오려고 기능은 뒷전이고 몸 라인만 잘 보여 줄 수 있는 레깅스를 입고 온다”며 “주변에는 인증샷을 찍기 위해 가격이 꽤 나가는 레깅스를 사는 사람도 봤다”고 말했습니다.
온라인에서도 레깅스를 입은 등산객들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곤 하는데요. 지난 달 한 커뮤니티에서는 ‘제발 레깅스만 입고 등산하지 마세요’라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자신을 남성이라고 밝힌 글쓴이는 레깅스를 입고 등산하고 있는 한 여성의 뒷모습 사진을 올리곤 “저렇게 노골적으로 엉덩이를 드러내고 다니는 여성분들이 한둘이 아니다. 본인도 민망하지 않냐”며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레깅스 차림으로 산을 오르는 장면은 익숙하지 않을 뿐 잘못된 건 아닙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청계산에 오른다는 임경환(70)씨는 “젊은이들만의 스타일인데 뭐라고 할 건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그럴듯한 등산 용품 갖추지 않아도 산에 오르려는 마음 하나면 충분하다고 강조하면서요. 최근에는 남성을 위한 레깅스도 앞다퉈 출시되고 있다고 해요. 실제로 레깅스에 반바지를 겹쳐 입은 젊은 남성 등산객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죠. 남녀 가릴 것 없이 2030에게는 레깅스가 알록달록한 기존의 등산복을 대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 산을 찾는 2030 등산객이 많아지자 아예 이들을 타깃으로 한 상권도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청계산 자락에서 카페를 운영 중인 김지현(39)씨도 그중 한 사람인데요. 김씨는 "2019년 말부터 카페를 운영했는데, 주말에는 2030 등산객들이 정말 많이 온다"고 강조했습니다. 보통 산을 오르기 전이나 후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목을 축이러 들르는 사람들이 많다는데요. 그야말로 꿀맛일 것 같습니다. 김씨는 "건강하고 에너지 넘치는 모습이 요즘 트렌드(유행)"라며 "SNS 등 자신의 모습을 과시할 수 있는 길이 다양해지면서 산을 찾는 것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2030 등린이들을 위한 클래스도 인기입니다. 취미·여가 플랫폼에선 전문 산악인이 이끄는 '인왕산 야간 산행', '초보도 오를 수 있는 북한산' 등의 원데이 클래스(하루 강의)가 열립니다. 등산이 소위 말하는 '힙'의 아이콘이 된 만큼 강좌는 열림과 동시에 금방 마감되곤 합니다. 아웃도어 브랜드 블랙야크는 '한국의 100대 명산 챌린지'를 시작해 완등 인증을 하면 할인 혜택을 주는 이벤트를 시작하기도 했죠.
굳이 돈을 주고 참여하지 않아도 됩니다. 모바일 메신저 오픈 채팅방에서 같이 산을 오를 동행인을 구하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오픈 채팅방에선 산악회원이라는 말 대신 서로를 '등산크루'라고 부르는데요. 미리 날짜를 공지하고 그날 가능한 이들이 댓글을 달고 모여 산에 오르는 겁니다. 내려온 뒤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건 여느 등산객과 다르지 않다고 하네요.
등산객 최씨는 "원래는 헬스나 수영을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못하게 되자 산에 왔다"며 "건강 생각을 안 할 순 없으니 산이 제격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국립공원공단에 따르면 코로나19 확산으로 옥외활동이 급감한 3월 북한산 국립공원에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탐방객이 41.7% 증가했다고 합니다.
등산이 중년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때는 지난 것 같습니다. "주말에 산이나 가자"는 직장 상사의 말에 스트레스 받을 일도 이젠 없습니다. 2030이 먼저 산을 찾고 있으니까요. 누군가는 건강을 위해, 누군가는 SNS에 올릴 인증샷을 위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