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화염과 분노'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2017년 8월 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미국의 대(對)조선 침략기지인 괌도 공격할 수 있다"(2017년 8월 9일 북한 전략군)
북미 간 위험 수위의 군사적 위협 발언이 연일 쏟아지면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던 2017년 9월 23일 밤. '죽음의 백조'라 불리는 미국의 전략폭격기 B-1B 랜서가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북한 측 동해 국제 공역까지 침투했다. 미 전략폭격기가 북한 측 공해 상에 공개적으로 진입한 것은 1953년 정전협정 체결 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구체적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B-1B는 2대가 1개 편대를 이루는 만큼 이날도 2대가 출격했을 것으로 관측됐다. 또한 북한군이 미국 전략폭격기가 현관 문 앞까지 치고 들어왔음을 눈치챌수 있을만큼 근접 비행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위협이 허풍만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한 셈이었다.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감은 더욱 상승했고, 당시 기승을 부렸던 한반도 전쟁설도 재점화했다.
미국이 17일(현지시간) 한반도 인근에 전략폭격기 6대를 투입한 미일 간 초대형급 연합훈련을 벌였다. 보통 1, 2대 출격만으로 군사적 긴장감을 급상승시킬 수 있는 전략폭격기를 6대씩이나 한 곳에 집결시킨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미국은 무엇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18일 미국 인도태평양사령부에 따르면, B-1B 4대와 B-2 스피릿 2대 등 6대의 폭격기가 지난 17일 대한해협 등 일본 인근 상공을 비행했다. B-1B 랜서 4대는 미국 텍사스주 다이스 공군기지와 괌의 앤더슨 공군기지에서 출격했으며, B-2 스피릿 2대는 인도양의 디에고 가르시아 공군기지에서 출격했다. 이들은 24시간 동안 일본 오키나와(沖繩) 가데나(嘉手納) 기지에서 출격한 일본 항공자위대 소속 F-15ㆍ F-35B 전투기와 합세해 대한해협 등에서 BTF(Bomber Task Forceㆍ폭격기임무부대) 훈련을 실시했다고 사령부는 밝혔다.
미국이 6대의 전략폭격기를 동시 출격시킨 배경을 두고 당장 국내에선 '대북 경고용'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18일 시작된 한미 연합군사연습과 맞물려 이뤄진 대북 압박 시위가 아니냐는 분석이다. 하지만 군사 전문가들은 대북 압박용 훈련으로 보는 것은 무리라는 공통된 의견을 내놓았다. 북한의 도발 억제를 위해 과거 이뤄진 미국의 전략폭격기 전개는 통상 1, 2대였던 점에 미뤄 이번 훈련 규모는 과하다는 지적이었다.
미국이 먼저 북한을 자극할 정치적 명분도 부족하다는 분석도 나왔다. 미국은 2018년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를 자제해 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예방과 수해 복구에 집중하고 있는 북한 역시 당장 군사적 도발에 나설 개연성은 크지 않다. 오는 11월 대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공연히 북한을 자극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대신 전문가들은 이번 훈련이 미국의 DFE(Dynamic Force Employmentㆍ역동적 전력 전개)' 전략과 맞닿아 있다고 분석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최근 새롭게 제시한 미군 운용 전략인 DFE는 병력 운용의 유연성을 극대화해, 중국과 러시아 등 적성국이 미국의 전력 투사 계획을 예측할 수 없도록 불확실성을 높이는 것이 핵심이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부 교수는 "6대나 되는 전략폭격기를 결집시켜 일본과 함께 훈련한 것은 결국 중국이 모르는 사이 언제 어디서든 이 정도 규모의 전략자산을 투사할 수 있다는 능력을 과시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폭격기 등 전략자산도 '패턴'이 읽히지 않는 방식으로 전개한다는 미군의 새로운 작전 개념에서 비롯된 훈련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미국 인도태평양사령부도 이번 훈련에 대해 "우리의 도드라진 강점은 적들에게 대응하기 위해 우리가 선택한 시간과 장소에서 동맹국과 함께 작전을 할 수 있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공교롭게 이번 훈련은 양제츠(楊潔篪) 중국 공산당 외교담당 정치국원의 방한(21~22일)을 코 앞에 두고 이뤄졌다. 미일이 중국에 대한 군사적 경계감을 노골화하고 있는 동안 한중이 밀착하는 그림이 연출된 셈이다. 이를 두고 한 외교 소식통은 "미중 간 밸런싱(균형)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한국으로선 다소 부담스러운 모양새가 됐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