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술에 찌든 배불뚝이가 나야?” 4년 전 그날, 양치승을 살린 거울

입력
2020.08.21 09:00
12면
[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56>양치승


김우빈의 어깨, 최은주의 근육 만든 트레이너
4XL 사이즈 입을 정도로 몸 방치했던 시절도
“운동은 인생도 바꾼다… 그걸 보는 게 행복해”

‘열심히 살자.’

무미건조해 보이는 이 문장이 그에겐 삶의 푯대였다. 진짜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기에, 이 문장은 그의 생에서 펄떡펄떡 살아 뛴다. 그렇게 살도록 만든 끈은 어머니였다. 밖에선 정의감 넘쳤지만, 집에서는 허울뿐인 가장이었던 아버지에게 온 가족이 평생 폭력에 시달렸다. 아버지가 갖다 주는 돈으로는 생계를 꾸릴 수 없으니 어머니가 껌 공장에 다니며 2남2녀를 키웠다. 그런 어머니를 생각하면 나쁜 길로 빠질 수 없었다.

집에서 정을 받지 못하고 자랐지만, 남들에게 웃음을 주는 게 좋았다. 한때 개그맨을 꿈꾼 게 그래서다. 군대에서 걸린 허리디스크(요추 추간판 탈출증)가 인생을 바꿨다. 수술 대신 운동요법을 택해 몸을 공부하다 웨이트 트레이닝의 묘미에 빠진 거다.

2000년 처음 헬스장 문을 연 이후 확장을 거듭하며 성공을 거뒀지만, 믿었던 사람에게 크게 뒤통수도 맞아봤다. 운동이 일인 사람이 4년이나 술독에 빠져 살았다. 경제적인 손실보다 정을 줬던 사람에게 느낀 배신감이 컸다. 어느 날 들여다 본 거울 속 자신을 보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와, 완전 쓰레기네.’ 아직도 잊지 못하는 2016년 1월 2일이다. 얼굴은 퉁퉁 부어 푸석했고, 4XL 사이즈 티셔츠 속 배가 불룩했다. 키는 168㎝인데, 몸무게가 100㎏을 넘어섰다. 자신을 ‘쓰레기’라고 표현한 건 몸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신도 알코올에 찌들어 있었다.

다시 시작했다. 하루하루 운동이 주는 즐거움에 집중했다. 몸과 함께 시나브로 정신도 달라졌다. 자신을 괴롭혔던 사건을 떠올려도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 거울을 보고 정신 차린 그날은 다시 태어난 날이다.

양치승(45) 바디스페이스 대표가 ‘몸은 곧 정신’임을 새삼 깨달은 계기다. 세상은 그를 “배우 김우빈의 태평양 같은 어깨를 만든 트레이너”라고 부른다. 알고 보니 그가 김우빈에게 선물한 건 근육이 아니라 심장이었다. 김우빈이 3개월에 12만원인 헬스장 회비조차 낼 여력이 없던 무명 시절 “돈 생각하지 말고 나오라”며 트레이닝을 해 준 게 양 대표다. 그 시간, 김우빈이 양 대표와 함께 만든 게 몸뿐일까.

몸으로 인생의 돌파구를 만들어온 양 대표를 13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바디스페이스에서 만났다. 웃음도 눈물도 어우러진 세 시간은 그의 인생을 압축한 드라마 같았다.

◇‘차라리 고아였으면…’ 싶었다

-매니저를 두셨더라고요.

“네, 2년 반쯤 됐나 봐요. 점점 스케줄이 많아져서요.”

그는 요즘 본업 외에도 TV 예능 프로그램 출연에 유튜브, 건강식품 사업까지 하고 있다.

-배우로 활동할 때도 매니저는 없었지요?

“그렇죠. 대사도 별로 없는 단역 배우였으니까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닌 걸요. 하하.”

-출연한 작품이 몇 편쯤 되나요.

“1994년 국군홍보영화를 처음 찍었어요. 배우 박중훈씨가 주연인 ‘총잡이’(1995)라는 상업영화에도 단역으로 출연했고요. 그때 예명이 강철민이었어요. 하하.”

-배우가 꿈이었나요?

“어릴 때 꿈은 개그맨이었어요. 개그맨도 연기자니까 여러 요소를 배워둬야 한다고 생각해서 MTM이라는 유명한 연기학원도 다녔죠.”

-개그맨은 왜 되고 싶었어요?

“남을 즐겁게 하는 게 좋았어요. 학교 다닐 때 체육부장을 도맡아 했죠. 체육부장이 거의 오락부장 같은 역할이잖아요. 남이 나를 웃길 때보다 내가 남을 웃길 때 행복이 크더라고요. 힘들게 자라서 그런지.”

-힘들게 자랐어요?

“되게요. 음, 이런 표현을 하면 (부모님께) 죄송하지만, 차라리 고아였으면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아버지 때문이죠. 좋은 대학 나온 공무원이셨어요. 그것도 아버지 성정 탓에 중간에 그만뒀지만. 밖에서는 사람들이 ‘세상 저런 사람이 없다’는데 집에선 전혀 달랐어요. 돌아가셨을 때 솔직히 제 마음 속에 암 덩어리가 없어지는 느낌이었죠.”

-부친이 어땠기에 그랬나요.

“뭐, (안 좋은 일은) 다 하셨죠. 가장 참을 수 없는 게 어머니를 때리는 거였어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엄마가 맞는 걸 봤죠. 심지어 어머니가 환갑이 넘어서까지도 맞아서 고막이 터질 정도였어요. 일주일에 두세 번은 술을 드시는데 새벽에 들어오시면 구둣발로 저희들을 또 때렸죠. 아버지 들어왔는데 자고 있다고. 나이가 드셔도 바뀌지 않더라고요.”

-많이 힘들었겠어요.

“어릴 때부터 집에서 받은 게 없죠. 아버지가 집에 돈을 제대로 갖다 주지도 않아서 어머니가 껌 공장에 다니면서 저희를 키우셨어요. 형편이 어려우니까 유치원에 다니지도 못했고, 학원은 뭐 생각도 못했죠. 생일이건, 졸업식이건, 입학식이건 아버지한테 뭘 받아본 적도 없고요. 정을 많이 받지 못하고 자라서 그런지, 사회에 나와서 남들한테 정을 많이 줬죠. 누가 저한테 잘해주면 저는 배 이상 잘해줬어요.”

그의 눈시울이 벌게졌다.

-집이 지옥이었겠네요. 사춘기 같은 예민한 시기에는 자칫 엇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요.

“사춘기 방황 같은 건 행복한 사람들의 고민이죠. 여러 가지로 힘들다 보니 저는 사춘기도 없었어요. 고등학교 졸업해서 얼른 집을 나가고만 싶었죠. 제 나름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또 나쁜 길로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고요. 엄마 때문에… 엄마가 너무 고생을 했으니까… 엄마가 너무 불쌍했거든요. 그저 그 시기가 빨리 지났으면 했어요.”

어머니 얘기에 그의 큰 눈에서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는 한동안 펑펑 눈물을 쏟았다. 눈물 속에 어린 시절이 함축돼있었다.

◇이 악물고 돈 번 이유

-어머니는 어떤 분인가요.

“어머니는, 끈이죠. 내가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마음먹게 하는 끈. 자식들마저 못 살면 엄마 인생에 희망이 없을 것 같아서요. 그래도 자식 중에 한 명이라도 제대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이 악물고 살았어요. 30대 중반에 처음 산 집도 어머니에게 드렸죠.”

-그렇게 마음먹었어도 어린 나이에 그런 시기를 견디는 게 어려웠을 텐데 친구들을 웃기는 게 좋았다니 대단해요.

“어리니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집에선 힘든데 학교는 즐거웠거든요. 집에 있으면 괴로우니까 학교에 엄청 일찍 갔어요. 공부는 안 했지만요. 학교 끝나고도 애들과 놀 생각에 집에 안 갔죠. 어차피 가 봐야 어머니도 안 계시고 집이 행복하질 않으니까. 지금도 기억나는 게, 놀다가 저녁이 되면 애들은 밥 먹으러 다 집에 가는데 저는 혼자서 몇 시간을 돌아다니다 최대한 늦게 집에 갔어요. 그래도 이상한 짓은 못했죠. 우리가 잘못되면 또 엄마 탓으로 (아버지가) 몰아서 때릴 테니까. 군 제대하고 나서는 집에 십 원도 손 벌리지 말자고 결심했죠.”

-제대하고 나서는 어떻게 돈을 벌었나요.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요. 족발 배달, 피자 굽기, 버스 운전… 안 해 본 일이 없죠. 고등학교만 나왔으니,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무조건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대학까지 십 몇 년 공부로 노력할 때 저는 그렇지 못했으니까요. 남들 8시간 일할 때 저는 15, 16시간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한달에 100만원을 벌면 80만원은 적금을 넣었어요. 아끼고 아꼈지만, 그래도 얻어먹지는 않았어요. 친구들한테 맥주 한두 잔에 통닭은 샀죠. 지금도 내 옷은 상설매장 돌아다니면서 사도 남들 선물할 때는 아끼지 않아요.”

-운동은 언제 본격적으로 하게 됐나요?

“제대로 하기 시작한 건 제대하고 나서예요. 남들은 군대에서 ‘보통만 하라’고 하는데, 저는 삽질을 해도 끝까지 하는 성격이어서 군 생활도 열심히 했어요. 남들 휴가 10번 나갈 때 저는 절반도 안 나갈 정도였죠. 그러다 제대를 두세 달 앞두고 허리를 다쳤어요. 아침에 일어나질 못 하겠더라고요. 누워서 다리를 올리면 10도도 안 올라갔죠. 국군수도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허리디스크 4ㆍ5번이 흘러내린 거였어요. 군에서는 전역을 하라는데, 불명예 제대잖아요. 의병제대니까요. 그렇게 열심히 군 생활을 했는데 억울해서 못 받아들이겠더라고요. 두 달을 버텨서 만기 제대를 했죠.”

-제대하고 치료를 한 건가요?

“척추ㆍ관절 치료로 유명한 병원에 찾아갔어요. 그런데 허리디스크에 완치란 없더라고요. 수술해도 재발될 수 있고요. 수술을 포기하고 한 달 입원해 있는 동안 물리치료를 받고 혼자서 재활운동도 했어요. 척추 구조는 어떤지, 허리디스크 원인은 뭔지 공부도 했죠. 퇴원할 때쯤엔 다리가 90도까지 올라가더라고요.”

-그 뒤엔 어떻게 했나요.

“몸을 많이 쓰는 일은 하지 못하니까 은행 청원경찰 알바를 했어요. 척추 주변 근육을 강화해야겠다 싶어서 체육관도 다니고요. 그런데 거기가 보디빌더 국가대표 선수들이 훈련하는 곳이었어요. 자연스럽게 저도 웨이트 트레이닝에 빠졌죠. 아카데미도 다니고요. 테이블 6개짜리 실내 포장마차를 1년쯤 했는데 그때 모은 돈으로 체육관을 열게 됐어요.”

당시 체육관에서 알게 된 ‘아는 형’의 권유로 동업해 2000년 처음 차린 헬스장이었다.

◇헬스장 시설보다 중요한 건

-남을 가르쳐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나요.

“그렇죠. 헬스장을 열면서 처음에 너무 불안하더라고요. 임대료가 한달에 385만원이었는데 그걸 낼 수 있을까 싶어서요. 당시 회비를 3개월에 10만원 받았거든요. 100명이 등록해도 석 달간 임대료만 겨우 낼 수준이잖아요.”

-실제 운영은 어땠나요.

“정말 열심히 했어요. 새벽 6시부터 나가서 헬스장에서 살았죠. 당시는 퍼스널트레이닝(PT) 같은 게 없던 시절이에요. 회원들이 오면 그냥 알려주는 거죠. 얼굴을 다 기억했어요. 이름 부르면서 인사하고 세세하게 가르쳐주니까 회원들도 헬스장 오는 게 즐거운 거죠. 그러다 보니 새로운 회원이 계속 늘더라고요. ‘야, 이래서 장사를 하는구나’ 싶었죠.”

그 재미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열정을 다해 일했는데, 동업자는 뒤로 딴짓을 하고 있었다. 크게 실망해 그곳을 나왔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월급 트레이너로 강남의 유명한 헬스장을 전전했다. 잘 되는 곳의 트레이너들이 궁금해서였다.

-얼마나 다녔나요?

“3개월씩 1년간 네 군데 정도를 다녔어요. 처음부터 관장으로 헬스장을 차린 거니까 내가 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월급 트레이너였는데도 밤 늦게까지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일과가 끝나고도 기구들 점검해서 망가진 건 건의해서 고쳐놓았죠. 실제 헬스장을 운영해보면 그런 직원은 별로 없거든요. 그러니 당시 관장들이 좋아할 수밖에요. 3개월이면 팀장을 달았어요. 다른 직원들이 낙하산이냐고 수군댈 정도였죠. 그렇게 1년을 일했지만 결과적으로 배운 건 별로 없었어요.”

-왜요?

“트레이너들이 대개 회원 위에 있더라고요. 자기는 몸이 좋으니까요. 지금도 그래서 트레이너들에게 겸손해야 한다고 자주 말해요. 서비스업이니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1년간 그렇게 전전한 뒤에는 어떻게 했나요.

“헬스장을 차릴 자금은 없으니까 폐업 직전의 헬스장을 찾아 다니면서 인수했어요. 그런 곳들은 보통 보증금도 싸고 권리금이 없었죠. 인수하기 전에 관장이 어떤 스타일인지 관찰한 다음 주변 상권을 살펴요. 인근 헬스장 시설은 어떤지, 얼마를 받는지 조사하고 분석하는 거죠. 괜찮겠다 싶으면 계약을 해요.”

-그래서 그런 곳을 어떻게 키웠나요.

“아예 헬스장에서 먹고 잤어요. 간판도 안 바꾸고 트레이너도 안 뽑고 혼자 운영했죠. 오전 6시에 오픈해서 회원이 오면 직업은 뭐고 이름은 뭐고 하는 소소한 것들을 묻고 대화를 나눠요. 운동하는 법도 친절하게 가르쳐주고요. 그럼 그 회원이 가족이나 친구들을 또 데리고 와요. 주변에 나처럼 관리해주는 곳은 없으니까. 시설 좋고 황량한 헬스장보다 작아도 정 있는 헬스장이 좋은 법이거든요. 재미있으니 회원들이 매일 나오는 거예요. 미친 듯이 일했죠. 보통 한달 반이면 흑자로 돌아섰어요.”

-가장 빨리 회원을 불렸을 때는 어느 정도나 됐나요?

“100명에서 시작해서 한달 반 만에 500명까지 늘어난 적도 있죠.”

◇그도 체지방율이 40%에 육박했다

그렇게 소규모 헬스장을 인수해 키운 뒤 되팔면서 경험을 쌓고 돈도 불려나갔다. 지금 그가 대표로 있는 ‘바디스페이스’라는 간판으로 헬스장 문을 연 게 2008년. 그 이후로도 한번에 서너 개씩 분점을 운영했다. 그러다 2012년 인생의 큰 위기에 맞닥뜨린다. 친동생처럼 자신을 따르던 지인에게 배신을 당한 거다.

“아무도 제 생일인지 모를 때 혼자 찾아와서 선물을 주면서 축하해주던 동생이었어요. 제게 그 정도로 정말 잘했어요. 누가 ‘걔 조심하라’고 할 때도 저는 모르는 소리 말라고 했죠. 그때 냈던 지점 하나도 ‘이거 해서 먹고 살라’고 맡길 정도로 믿고 좋아했어요. 당시 다니던 아이돌 회원들도 그 지점으로 옮기게 했죠. 그런데 알고 보니 뒤로는 제 이름을 팔아서 나쁜 짓을 하고 다닌 거예요. 직원들과 제 사이를 이간질 시키고요. 형제처럼 지내던 아이돌 회원들하고도 멀어졌죠.”

결정적으로 큰 경제적 손실을 입힌 사건이 일어났고 그걸 계기로 자신이 믿었던 사람의 실체를 알게 됐다.

-정말 충격이었겠어요.

“일단 금전적 손해가 엄청났죠. 지점들은 다 정리하고 본점만 남겼어요. 그리고는 2016년까지 술만 먹고 살았어요. 꿈을 꾼 것 같더라고요. 몸무게가 백몇 킬로그램까지 나갔죠. 체지방율이 40%를 넘었으니까요.”

-헬스장 관장인데 몸을 방치했네요.

“다 필요 없다,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근데 회원들하고는 친해졌죠. 매일 술 마시면서 친분을 다졌으니까. 하하.”

-극복이 어려웠군요.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헬스장만 운영한 거예요.”

-경제적 손실도 손실이지만 사람한테 받은 상처가 컸기 때문이겠죠.

“정말 좋아했던 동생이 나한테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거든요. 처음 3개월간은 정말 쫓아가서 어떻게 하고 싶더라고요. 머릿속으로 갖은 소설을 다 썼죠. 내 가족 때문에 참았어요. 그런 분노 이후에는 ‘어차피 다 과정이다’라고 세뇌했어요. TV 다큐 프로그램을 보니까 나보다 더한 일을 당한 분들도 다 이겨냈더라고요. 그 일로 내게 친절한 사람일수록 조심해야 한다는 걸 배웠죠.”

-어떻게 이겨냈나요.

“어느 날 아침에 딱 거울을 봤는데 내 모습이 너무 ‘동물스러운’ 거예요. 쓰레기 같더라고요. 2016년 1월 2일이었어요. 그때 정신 차려야겠다 싶었죠. 술 끊고 운동을 다시 시작해서 8개월 만에 몸을 만들었어요. 제 인스타그램 첫 사진이 몸을 다시 만든 날 찍은 거예요. 뭘 올릴까 하다가 제게는 시작의 의미가 있는 그 사진으로 했죠.”

-그 사진을 찍을 때 어떤 느낌이었어요?

“음, 다시 살아온 느낌이랄까. 나를 너무 오래 방치해뒀었거든요. 운동하는 하루 하루가 즐거웠어요.”

◇운동은 식이보다 재미

그 즈음 TV 예능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하게 됐다. 오래된 인연인 배우 성훈과 함께였다. 치열하게 먹고, 치열하게 운동하는 모습이 대중의 호감을 샀다. 그에게 ‘방송인’이라는 제2의 직업을 안긴 전환점이다.

-운동도 운동인데 많이 먹는 모습이 충격이었어요.

“저는 원래 먹으면서 운동해요. 회원들한테도 먹는 것에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조언하죠. 식단 관리에 집중하다 보면 지레 운동까지 포기하게 되기 쉽거든요.”

-대개 트레이너들은 식이요법을 강조하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시작할 때 저한테 물어요. ‘술 마셔도 돼요?’ 제가 ‘왜 안 마시는데?’ 그러죠. 그럼 ‘근육이 없어지잖아요’ 해요. 근육은 지금도 없는데, 술 안 마신다고 근육이 생기나요? 하하.”

-그럼 어떻게 하라고 조언하나요.

“처음부터 과하게 욕심 부려서 스트레스 받지 말고 일단 운동에 재미를 붙이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죠. 한 단계씩 올라가도 충분해요. 배우나 모델처럼 몇 개월 만에 몸을 만들어야 하는 특수한 직업을 가진 이들을 제외하고는요. 운동에 즐거움을 느끼게 되면 나도 모르게 술 맛이 없어지죠.”

그는 여러 피트니스 대회를 휩쓴 배우 최은주의 운동을 도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최은주씨를 트레이닝한 이유는 뭐였나요.

“원래 다른 센터의 회원이었는데 그곳이 문을 닫으면서 우리 헬스장으로 인계된 경우였어요. 몸을 만들고 있다고 들었는데 안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물어보니 영화 촬영에 들어가기로 했는데 그게 무산됐다는 거예요. 제가 담당 트레이너한테 ‘저 친구(최은주) 내가 관리해도 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했죠.”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은주에게 물어봤어요. ‘왜 운동을 안 나오느냐’고. 그러니까 작품이 없대요. ‘왜 작품이 없냐’고 하니, ‘불러줘야 찍지 않겠느냐’고 해요. 맞는 말이더라고요. 잊힌 배우였던 거예요. 은주를 복귀 시킬 방법은 이슈를 만드는 일이겠다 싶었어요.”

피트니스 대회 출전으로 동기를 부여했고 그녀는 3개월 만에 ‘2018 맥스큐 머슬마니아 오리엔트 챔피언십 미즈비키니 클래식’에 나가 1위를 했다. 올해엔 ‘2020 아시아 피트니스 콘테스트’ 비키니 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여러 매체들이 그녀의 행보를 앞다퉈 보도한 건 물론이다.

-최은주씨를 도운 이유는 뭔가요.

“은주는 제가 단역 배우일 때 활동했던 배우거든요. 그래서 남 같지 않은 느낌이었죠. 다시 잘 됐으면 좋겠더라고요.”

-본인 못지 않게 기분이 좋았을 것 같아요.

“그렇죠. 배우 성훈이나 (김)우빈이를 가르칠 때도 그랬어요. 그저 그들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마음 하나로 도왔죠. 그런데 신기한 게 그들이 잘 돼서 저한테도 좋은 일이 생기더라고요. 은주의 경우도 그래요. 은주가 대회에서 우승하니까 저한테 전국 각지에서 수업 의뢰가 들어오더라고요. 잠 잘 시간도 없이 수업을 했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체육관도 확장해서 이전했어요.”

◇무명이던 김우빈, 돈 안받고 가르친 이유

-배우 김우빈씨와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우빈이가 무명일 때 우리 체육관에 다녔어요. 말라서는 키만 훌쩍 커서 지금하고는 모습이 사뭇 다를 때죠. 그런데 6개월인가 다니고는 언젠가부터 안 나오더라고요. 물어보니까 회사에서 돈도 못 받는데 가정형편도 어려워져서 찜질방에서 지내고 있다는 거예요. 3개월에 12만원 하는 헬스장 회비 낼 여력도 없었죠. 옥상으로 우빈이를 불렀어요. 얘기 다 들었다고,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지만 헬스장은 편히 다니라고, 혹시 몸 만들고 싶으면 도와줄 테니 말하라고요.”

-그때는 이렇게 톱스타가 될 줄 모르고 한 일이죠.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한 일이니까요. 톱스타가 되고 나서 다른 좋은 헬스장에서 제의를 많이 받았을 텐데도 우리 체육관을 계속 다녔죠. 나중에 스케줄이 많아져서 아예 집에 운동기구를 들일 때도 제가 세팅을 도왔어요.”

-사람들이 운동을 통해서 긍정적으로 바뀌는 걸 보면 어떤가요.

“배우 황석정 누님이 그래요. ‘내가 왜 이제서야 운동을 알았는지 모르겠다’고요. 직원 중에 한 친구는 제게 그러더라고요. 자기도 누군가에게 ‘당신 덕분에 삶이 바뀌었다’는 소리를 들어보고 싶다면서 부럽다고요. 그 얘기를 듣는데 울컥했어요. 나도 누군가를 변화시킬 능력이 있는 사람이구나 싶어서요. 힘들게 자랐지만, 내가 그런 사람이 됐다는 게 무척 기분이 좋아요.”

-얘기를 듣다 보니, 몸을 뭐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해졌어요.

“몸은 곧 정신이라고 생각해요. 몸을 만드는 건 정신이 하는 일이죠.”

-그럼 운동이란 뭘까요.

“재미예요. 고통이 돼선 안 돼요.”

-운동은 곧 다이어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데요.

“몸은 운동하면 저절로 만들어져요. 저는 커피를 한 잔 마셔도 체육관 와서 마시라고 해요. 헬스장 1년 회비로 따지면 하루에 천원 꼴이거든요. 하루 천원 내고 몇 시간을 이렇게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곳이 있나요? 운동복 주죠, 물 있죠, 샤워도 할 수 있죠, 얼마나 좋아요? TV도 러닝머신을 하면서 보면 재미있어요. 체육관에 안 나가면 허전해지잖아요? 그때부터 몸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트레이너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먼저 경험했기 때문에 길을 닦아줄 뿐이죠. 노력해서 그 길을 가는 건 본인이에요. 트레이너가 시켜서 하는 운동은 재미도, 의미도 없어요.”

-양치승이라는 이름 앞에 수식어를 붙인다면요.

“인간 양치승요. 저는 뭘 하든지 인간적이고 싶어요. 심지어 제가 믿고 도와줬던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험한 일도 많이 당했지만, 결국은 저한테 득이 되어 오더라고요.”

-지금까지 살면서 지켜온 삶의 도가 뭔가요.

“음, ‘열심히 살자’ 밖에 없어요.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대신 일을 마치 서울대 갈 것처럼 해야 했어요. 방송 일이 많아졌지만 지금도 매일 체육관에 나오고 트레이너들보다 늦게 퇴근하죠.”

개그맨이 남을 웃게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본래 꿈을 이룬 것 같다. 몸으로 정신을 넘어 인생까지 변화시키는 걸 돕는 사람, 그리하여 그들이 웃는 모습을 보는 게 행복한 ‘인간 양치승’이니까 말이다.



김지은 논설위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