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탓에 겨울 휴가도 못 가서, 여름엔 국내 여행이라도 가려 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 집에만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세종에 사는 직장인 최모(30)씨는 최근 여가시간 대부분을 멍하니 창문만 보며 보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상반기 내내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해 집과 직장만 오갔는데, 요즘은 최근 기록적인 폭우까지 겹쳐 바깥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 최씨는 "휴가를 내봤자 어디 갈 곳도 없어 이틀만 휴가를 쓰고 집에만 있었다"며 "이러다 우울증이라도 걸리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마저 든다"고 토로했다.
코로나19로 외부활동이 차단된 상황에서 한 달 넘게 장마가 이어지자, 우울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더 늘어나고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생긴 무기력을 뜻하는 '코로나 블루'에 이어, 이제는 장마 장기화에 따른 '레인 블루'까지 겹쳤다는 푸념이 나온다.
9일 한국일보가 접촉한 주요 대학병원 정신의학과 전문의들에 따르면, 기존에 정신의학과를 찾는 환자 중 약 30%가 코로나19와 장마로 인해 정신건강 상태가 악화됐다고 호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존 환자들의 우울감이 커지는 이유는 △대규모 자연재해가 잇따라 발생한 데다 △이 장마가 언제 끝날지도 불분명하며 △외부활동까지 차단되어 스트레스를 해소할 창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권준수 서울대병원 정신의학과 교수는 "코로나19가 다소 잦아들며 외부 활동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 시점이었는데, 장마가 찾아오자 실망한 환자들이 더욱 큰 우울감을 호소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별히 우울증 치료를 받지 않는 사람들도 줄줄이 이어지는 폭우와 흐른 날씨 탓에 우울한 상태가 길어진다고 말한다. 서울 관악구 주민 최모(29)씨는 "코로나19는 끝날 기미가 안 보이고, 폭우는 기후위기의 전조현상 같다"며 "앞으로 매년 이같은 일이 반복될 것 같아 불안하다"고 했다. 경기 수원시에서 여덟 살 자녀를 키우는 이모(36)씨는 "여름휴가는 꼭 가자는 마음으로 시어머니 반대까지 무릅쓰고 지난 주 거제도에 갔지만 비가 너무 많이 와 아무것도 못 했다"며 "모처럼 가족끼리 의기투합을 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아 심란하다"고 말했다.
장마가 길어짐에 따라, 코로나19 사태를 근근이 버텨 온 자영업자들의 한숨도 늘어만 간다.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에서 식기류를 판매하는 조용해(56)씨는 "코로나19가 한풀 꺾여 사람들이 좀 돌아다니나 했더니, 이제는 비가 쏟아져 발길이 다시 뚝 끊겼다"며 "힘들다는 말만 7개월째 하는 것도 지친다"고 푸념했다. 지하철 4호선 회현역 인근에서 식당을 하는 이모(58)씨도 "사람이 다니질 않으니 주말 장사가 안 된다"고 했다.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상황이 이미 변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현재 상황에서 즐길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권 교수는 "집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독서를 하는 등 변화 속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홍나래 한림대성심병원 정신의학과 교수는 "코로나19와 장마 때문에 평소 알던 사람들과 물리적 만남이 줄어들더라도, 평소보다 더 연락을 자주 하는 등 교류를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며 "정서적으로 고립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