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게 뭐야. 당장 밖으로 나가!" "여기 탁구치러 왔어?"
2003년 4월 국회 본회의에 흰색 면바지, 노타이 차림으로 '의원 선서'를 하러 올라왔던 당시 유시민 개혁국민정당 의원에게 동료 의원들은 야유와 질타를 보냈다. 박관용 국회의장이 "양당 총무에게 사전에 (복장 관련) 설명을 했다"고 양해를 구했으나 한나라당 의원 10여명은 품위 손상이라고 항의하면서 '선서 보이콧'을 선언하고 퇴장해버렸다. 거센 반발에 결국 유 의원은 다음날 정장을 갖춰입고서야 의원 선서를 마칠 수 있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2020년 8월 국회 본회의에 나타난 빨간 원피스를 입은 류호정 정의당 의원. 의원들의 반응은 달랐다. 여야, 혹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응원과 지지는 물론 "세상은 변했다"며 류 의원의 옷차림을 향한 일각의 비판을 나서서 옹호하고 있다.
가장 먼저 류 의원에 대한 '연대'의 목소리를 낸건 여성 의원들이었다.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5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그녀(류 의원)가 입은 옷으로 과도한 비난을 받는 것에 대해선 동의할 수 없다"며 "국회의 과도한 엄숙주의와 권위주의를 깨준 것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밝혔다. 같은당 유정주 의원도 과거 '백바지'와 류 의원의 원피스를 언급하면서 "2040년에도 비슷한 논쟁이 반복될지도 모르겠단 합리적 우려가 된다. '아, 쉰내 나'"라고 직설적인 화법으로 비판했다.
남성 의원들도 여야를 막론하고 류 의원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안민석 민주당 의원은 "17년차 국회 꼰대가 류 의원을 응원한다"며 "넥타이 매고서 소리 질러가며 삿대질하는 동물국회보다 캐주얼 차림으로 열심히 일하는 국회가 국민들에게 더 사랑받을 것"이라고 썼다.
과거 유시민 의원의 옷차림에 격렬한 항의를 보냈던 한나라당 계보의 미래통합당에서도 주호영 원내대표가 "류 의원의 의상을 문제 삼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라고 기자간담회에서 강조하는 등 달라진 인식을 보였다. 김재섭 통합당 비상대책위원도 "(류 의원의) 복장이 어디가 어떤가, 국회가 학교냐"고 되물었다.
류 의원은 본회의장에서도 주변 의원들이 자신의 옷차림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도 전했다. "오히려 본인도 편하게 입고 싶다고 말하는 남성 의원들이 있었다"는 것. 국회 본회의장에서 류 의원의 이웃에 앉는 김진애 열린민주당 의원도 관련 논란에 "류 의원 바로 옆자린데 복장을 의식하지 못했다"고 밝힌 바 있다. 류 의원은 국회 개원식 당일인 지난달 16일에도 반바지 차림으로 본회의장에 나타났지만 이를 둘러싼 소동은 없었다.
과거 유시민 의원이 본회의가 시작되기도 전 자신의 '파격 복장'의 이유를 설명하는 보도자료를 언론에 배포했던 것과는 달라진 장면이다. 유 의원은 배지를 달기 전인 1998년 11월 한 주간지의 기고문을 통해 독일 녹색당 출신 외무장관이 지방정부 장관 취임 당시 청바지를 입고 선서를 했다는 사실을 소개하는 등 용의주도한 전략을 세웠다.
반면 류 의원은 옷차림으로 국회의 권위를 깨려는 시도였다면서도, 이 정도까지 논란이 될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다. 류 의원은 6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원피스 말고도 이제 일하는 모습에 대해 인터뷰를 많이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21대 국회에 입성한 2030세대 의원은 13명이다. 아주 많은 수는 아니지만 20대 국회(3명)보다 다소 늘었다. 지난 16대~20대 국회에선 단 한 명도 없던 20대 의원도 두 명이나 탄생했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과 류 의원이 그 주인공이다.
류 의원의 원피스 차림의 시발점도 사실 이들 청년 의원들이었다. 2040 청년 국회의원 18명이 모인 연구단체 '2040 청년다방'이 3일 열었던 창립 모임에 참석했던 의원들이 다음날 본회의에도 같은 복장으로 참석하기로 약속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해당 단체의 공동 대표인 유정주 의원은 "그날 류 의원은 원피스를 입었고, 저는 청바지를 입었었다"며 "결론적으론 저만 약속을 못지킨 꼴이 됐다"고 뒤늦게 밝히기도 했다.
정작 류 의원을 향한 비판은 국회 내부에서보다는 바깥에서 나왔다. 때문에 복장 지적을 가장해 청년, 그리고 여성 정치인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적지 않다. 류 의원 역시 "정장, 양복을 입었을 때도 왜 어린 애가 정장을 입느냐는 반응이 나왔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논란이 중장년 남성이라는 견고했던 국회의 벽에 균열이 가며 겪는 '성장통'이라고도 본다. 유창선 정치평론가는 이에 "새로운 것이 등장하려면 낡은 것과의 싸움을 거쳐야 하는 법. 청년 정치인들이 잘 이겨내기 바란다"고 조언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