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현지시간) 5,0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레바논 베이루트 항구 폭발 참사는 예상대로 ‘인재(人災)’였다. 대폭발의 도화선이 된 화학물질 관리 부실, 안전 불감증 작업 환경 등 대형 사고를 초래할 악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6년 동안 관계 기관들이 서로 관리 책임을 미룬 탓에 잘못을 시정하고, 위험 요소를 제거할 기회마저 날려 버렸다.
레바논 방송 LBCI는 5일 최고국방위원회 회의 참석자들을 인용해 “근로자들이 창고 문을 용접하던 과정에서 화학물질에 불이 붙었다”고 사고 경위를 전했다. 용접 불꽃이 근처에 적재돼 있던 질산암모늄에 옮겨 붙어 강력한 폭발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용접할 때는 불꽃이 다량 발생해 인화물질을 멀리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기본 안전수칙은 극강의 인화성을 갖춘 질산암모늄을 곁에 두고도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베이루트 항구 관리를 담당하는 하산 크레이템은 “보안국 요청에 따라 폭발 몇 시간 전에 창고 문 정비 작업을 수행했다”고 인정했으나, 구체적인 정황은 알려지지 않았다.
6일 현재 사망자는 최소 137명, 부상은 5,000여명으로 집계됐다. 이재민도 30만명에 이른다. 정확한 사고 조사 결과는 닷새 후 발표될 예정이다.
이번 참사의 핵심은 질산암모늄이 무려 2,750톤이나 도시 한복판에, 그것도 6년간 방치됐다는 사실이다. 과정은 이랬다. 대량의 살상 도구가 베이루트 항구로 흘러 들어 온 것은 2013년. 질산암모늄을 가득 실은 러시아 회사 소유의 화물선은 조지아를 출발해 아프리카 모잠비크로 향하다 기계 고장으로 우연히 베이루트에 정박했다가 현지 당국에 억류됐다. 러시아 선원노조는 이날 미국 CNN방송에 “항만 시설이용료 미납 등의 문제로 레바논 당국과 마찰이 심했다”고 말했다.
양측이 좀처럼 접점을 찾지 못하면서 선주와 선원들은 수개월간 선상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이들은 당시 선박을 ‘떠다니는 폭탄’으로 불렀다. 질산암모늄의 위험성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단 얘기다. 결국 승선자들은 배를 포기하고 떠났다. 이듬해 항만 당국은 남겨진 질산암모늄을 배에서 내려 12번 창고에 저장했다.
질산암모늄 처분 시도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중동 매체 알자지라에 따르면 레바논 세관 측은 2014년 6월부터 2017년 10월까지 최소 6차례 법원에 해외 수출이나 육군 및 민간 화학회사에 넘기는 방안을 제시했으나 아무런 답변을 듣지 못했다. 이후 폭탄 더미는 점차 잊혀졌다.
책임 회피는 정부 기능이 상실된 레바논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는 “1990년 내전이 끝난 후 18개 종파로 나뉜 연약한 민주주의 체계 위에서 군 지도자들이 실세로 등극했다”면서 “이들의 권력 다툼으로 정치적 협의는 불가능하고 부패만 만연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흔히 ‘모자이크 국가’로 불리는 레바논의 종교 다양성 뒤에는 이처럼 부패 만연이란 고질적 병폐가 자리잡고 있다. 당연히 민생 경제는 고꾸라졌다. 현재 레바논의 정부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160%에 달한다. 때문에 정부가 추산한 참사 피해액(약 17조7,800억원)을 자체적으로 감당하는 건 언감생심이다.
분열된 권력 구조로 사고 수습 과정에서 책임자 처벌 등을 놓고 또 다른 분란을 일으킬 가능성도 높다. 비영리 싱크탱크 채텀하우스의 리나 카티브 중동ㆍ북아프리카프로그램 단장은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에 “레바논이 주권국가로서 책무를 적절히 수행할 수 없는 ‘실패한 국가’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