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모굴스키 국가대표 선수 서정화(30)씨는 고(故) 최숙현 선수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과정을 톺아보며 '역시'라고 생각했다. 폭언ㆍ폭행하는 지도자, 고발조차 쉽지 않은 현실,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사후처리 탓에 절망감을 느끼는 피해자까지. 비상식적인 상황이 상식처럼 굳어버린 체육계 모습은 10년 전과 변함이 없었다.
서씨는 7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사건을 보도로 접하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아 소름이 돋았다"며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체육계 인권 실태는 큰 변화가 없다"고 지적했다. 12년간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하던 서씨는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 스포츠혁신위원회에서 위원으로 활동하며 권고안을 만드는 데 참여했다. 지금은 선수들의 인권 유린 문제나 구조적 병폐를 해결하기 위해 국내 로스쿨로 진학해 법을 공부하고 있다.
서씨가 생각하는 이번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은 '고립된 체육계'에 있다. 어렸을 때부터 학교 생활은 미룬 채 운동에만 집중해야 하는 ‘운동선수만의 세계’에 갇힌다는 것. 서씨는 "체육계는 다른 분야에 비해 고립성이 크다"며 "엘리트 운동선수가 되기 위해선 학업 등 다른 생활들은 포기해야 하고, 인생 전부를 바쳐야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다른 사회와 교류할 수 있는 기회인 학교 생활은 시도부터 차단당한다. 서씨는 "공부를 하면서 운동선수 생활을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며 "나 역시 고등학교 때 합숙생활을 하지 않으려면 국가대표 포기각서를 쓰라는 강요를 받기도 했다"고 했다. 그러나 서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서울외고 영어과,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 동아시아학과를 다니면서 선수 생활을 병행했다. 운동과 학업이 별개의 것이 아니란 점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폭력ㆍ폭언도 정당화된다. 성적과 메달 등 결과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에서 엘리트 선수의 목적은 올림픽 출전, 국위선양에 두기 때문에 개개인의 인권은 부차적인 요소가 된다"며 "지도자들은 폭력ㆍ폭언 등이 성적 올리기에 효과가 좋다는 이유로 정당화한다"고 지적했다.
폭력 등의 문제를 신고할 경우, 이제껏 전부를 바쳐왔던 '선수 생활'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서씨는 "엘리트 선수들은 운동 이외의 대안이 없다"며 "신고가 자신의 선수생활뿐 아니라, 심할 경우 팀 해체까지 빚어질 수 있는데, 이는 자신과 동료들의 삶이 모두 송두리채 빼앗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설명했다. 피해자가 더 큰 피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현실이라는 것.
조사ㆍ처벌을 통한 발본색원도 말뿐이라 선수들은 좌절감만 학습한다. 서씨는 “최 선수가 죽기 전 대한체육회로부터 전화를 받고 ‘네 알겠습니다’라고 하는 녹취본을 들었다”며 “모든 걸 내려놓은 느낌을 받았는데, 이때 느낀 좌절감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 같다”고 했다.
서씨는 그래서 '열린 체육'이 가장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선수들이 운동만 하며 메달만을 위해 고립돼 살길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다양한 사회를 접할 수 있는 학교 생활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씨는 "엘리트 선수들도 다른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점도 로스쿨 진학에 영향을 미쳤다"며 "경쟁에서 승리해 메달을 따는 것만이 가치 있다는 생각을 깨고, 운동의 즐거움이나 협동ㆍ협업 등 다양한 스포츠의 가치를 몸소 느끼기부터 했으면 한다"고 바람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