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수도 이전을 노무현 대통령의 미완의 과업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2004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과 대안으로 추진된 세종 행정복합도시 사업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이슈를 유력 정치인으로 처음 꺼낸 사람은 실은 김대중 대통령이다. 1971년 4월 대선 유세에 나선 김대중 후보는 대전에서 “내가 집권하면 대전을 행정 부(副)수도로 만들어 1단계로 정부 각부의 외청을 옮기고 2단계로 행정부의 일부를 순차적으로 이전시키겠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대선 공약에 ‘충청권 행정수도 건설’을 담기 3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수도 이전은 이른바 민주ㆍ진보 진영의 전유물도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7년 서울에서 고속전철로 1시간 거리에 인구 10만명 규모의 임시행정수도 건설 구상을 발표한다. 통일 때까지 두는 한시적인 수도 이전으로 그때도 서울 과밀 해소가 이유였다. 이 계획은 1980년 신군부가 백지화했지만, 대전 3청사 건립 계획으로 지금 수도 이전 논의의 물꼬를 틔운 사람은 노태우 대통령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부기관 이전과 세종시 건설 계획을 뒤집으려던 이명박 대통령에게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반기를 들어 무산시킨 것도 아이러니하다.
행정수도 이전 논란이 다시 불붙었다. 헌재가 그랬듯 수도권 과밀화 해소, 지방균형 발전이라는 대의명분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서울이 수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정서가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행정수도 이전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이후 행정복합도시건설청장, 건설교통부 차관을 지낸 이춘희(65) 세종시장을 4일 세종시청에서 만나 수도 이전의 당위와 현실에 대해 들었다.
-여당의 행정수도 이전 논의가 속도를 내고 있다. 부동산 정책 실패를 피하기 위해 불쑥 꺼낸 꼼수로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갑자기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2012년 초대 세종시장에 도전하면서 국회 세종의사당과 대통령 제2집무실 이야기를 내가 처음 꺼냈는데 다들 뜬금없는 소리라고 했다. 당시 총선에 세종시에서 출마한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같은 내용을 공약에 담았고, 그해 문재인 후보의 대선 공약에도 포함됐다. 그 후 총선, 지방선거에서 한 번도 빠짐없이 나왔던 이야기다. 2017년 대선에서는 문재인, 홍준표, 안철수, 유승민, 심상정 후보 모두 강하게 행정수도 이전을 약속했다. 2018년에 청와대가 내놓은 개헌안에도 수도에 관한 사항을 법률로 정한다고 이 사안을 정리해 놓았다.”
-행정수도 이전은 헌법재판소 위헌 결정이라는 큰 걸림돌이 있다. 개헌이나 국민투표, 특별법 제정 등 재논의를 위한 방안이 다양하게 거론되는데.
“개헌이 가장 확실하고 좋은 방법이지만 그게 언제 가능할지 모른다는 어려움이 있다. 여야가 합의해 다시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도 방법이긴 하나 또 위헌 시비에 휘말릴 가능성이 없지 않다. 국민투표는 찬성하지 않는다. 국민투표는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의 틀 안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선택 가능한 것인데 일단 위헌 결정이 난 사안이라 그 틀을 벗어났다는 논쟁을 부를 수 있다. ‘투트랙 개헌’이 바람직하다. 국회의사당 분원 건립 등 현행법 체계에서 가능한 것부터 해결해가면서 개헌이 가능할 때 이를 정리해 담자는 거다.”
-노무현 정부의 수도 이전 실패는 당시 여야도 합의했던 사안이 국민적 반대에 부딪힌 결과로 볼 수 있다. 여당은 수도권 과밀화가 그때보다 심각해져 지금 여론은 달라졌다고 판단하는 것 같지만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서울 수도에 찬성하는 사람이 여전히 더 많다.
“질문에 따라 답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냥 묶어서 수도 이전을 물으면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 여전히 있지만 국회 이전은 62% 정도가 지지한다. 특히 서울 시민의 생각은 복잡할 수 있다. 위헌 결정이 해소되지 않았으니 꺼림칙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지금 추진되는 수도 이전은 미국 뉴욕, 워싱턴처럼 서울은 경제수도, 세종은 행정수도로 가자는 것이다. 수도권 집중 문제가 그때보다 훨씬 커졌다. 국정 비효율도 심각하다. 이전에 대한 여론의 공감대가 노무현 정부 출범 당시보다 더 넓어졌다고 본다.”
-설사 수도를 이전하더라도 수도권 과밀화가 해소될지, 집값이 안정될지 의문이다. 세종시로 행정부처의 3분의 2가 옮겨 왔다. 권역별 혁신도시 사업도 추진됐다. 그런데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 몰려 살고 서울 집값은 천정부지로 오르지 않나.
“효과가 없었다기보다 작았다고 보는 게 맞다. 행정수도 이전 구상을 가다듬을 때 수도권 인구 집중 이유를 봤더니 일자리, 교육이 핵심이었다. 일자리를 푸는 열쇠는 기업이 쥐고 있다. 그래서 공공기관을 옮기면 그와 연관된 민간기업도 이전될 걸로 본 거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에서 시작한 일이 정권이 바뀌면서 뒷받침되지 않았다. 중앙정부 분권화,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의 분산이 안 되다 보니 연관기관과 기업 이전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의 균형발전 정책 이후 한동안 수도권 지역총생산이 하락 추세이다가 2012년부터 반등한다. 인구 증가 추세도 완만해졌는데 최근 들어 가속이 붙기 시작한 것이다.”
-세종시 복합행정도시 사업이 당초 계획 대비 충분한 성과를 냈다고 보나.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법’을 협상하던 2005년 2월에 여야는 18개 부처 중 6개만 남기는 네거티브 방식의 합의를 봤다. 남기는 부처만 법에 명기해 나머지는 모두 이전하도록 한 것이다. 그 원칙에 따르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당연히 내려왔어야 하는데 정권이 세 번 바뀌도록 서울에 있다 지난해에야 이전했다. 입법 취지에 따르면 내려와야 하는 정부 산하 처, 청, 위원회도 있고 산하기관도 수두룩하다. 그런 부처와 기관들이 버티고 서울에 있으니 애초 특별법의 구상이 충분히 실현됐다고 보기 어렵다.”
-일자리 없는 지역 발전이란 공허한 구호다. 일자리도, 교육 서비스도 대부분 수도권에 몰려 있다.
“기업의 지방 이전을 정부가 강제하기는 어렵다. 지난 산업화시대에나 가능한 일이다. 기업은 기업대로, 대학은 대학대로 의사결정 구조가 있다.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솔선수범밖에 없다. 공공기관이 내려가고 따라 연관기업이 가도록 유도해야 한다. 나주 혁신도시에 한전이 가고 난 뒤 430개 관련 기업이 이전했다. 그런 이전을 적극 지원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1차 공공기관 이전 발표 대상이 153개였는데 지금도 서울과 수도권에 남아 있는 기관이 적지 않다. 수도권에 있어야 하는 기관이 아니라면 옮겨야 한다. 기업의 지방 이전에는 공장 부지 매각이나 이전 비용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를 세제, 금융지원 등으로 적극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움직이기 어렵다. 노무현 정부는 씨만 뿌린 것이고 물과 비료로 잘 키워야 했는데 그게 안 됐다.”
-수도 이전에는 유권자의 표심도 얽혀 있다. 균형 발전이라는 명분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지만 공공기관 이전 등으로 집값이나 생활 편의성이 떨어지는 걸 반길 사람도 없다. 행정수도 이전 논의가 반짝하다 수그러들지 않을까.
“최근 집값 상승을 서울 사람이라고 다 좋아하나. 집값 올라 돈 버는 사람은 소수이고, 지금 같은 급등은 바람직하지 않다. 젊은이들은 집 구하기도, 결혼하기도, 아이 낳기도 힘들다고 한다. 부모가 넉넉한 집안이 아니면 결혼도 망설여야 하는 게 정상인가. 집값 올라 이익 보는 사람이 양보하지 않으면 이런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다. 부동산 가격 안정이 좋은지, 집값의 주기적인 상승을 방치하는 게 나은지 선택해야 한다.”
-미래통합당에서는 행정수도 이전에 공식적인 의사 표시를 하지 않고 있다. 함구령까지 내렸다는데.
“지난 대선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는 ‘헌법을 개정해 세종시를 행정수도로 지정하겠다’고 했다. 이후 당명이 바뀌긴 했지만 특별히 반대 의견을 밝힌 적이 없으니 그게 당의 공식 입장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국회 분원도 찬성해 이미 세종의사당 설계 연구 작업까지 진행되고 있다. 현재 조심스러워하는 것은 절차나 방법, 시기 등의 문제에서 의견을 종합하지 못한 것일 뿐 큰 틀에서 행정수도 반대는 아니라고 본다. 망설일 이유도 없다.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