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각만으로도 가슴 떨렸던 나라다.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의 압도적 경제력, 세계의 경찰역할과 우주방위사령부를 둘 수 있는 국방력, 5대양 6대주의 정보를 파악하고 조율하는 외교력 등 단연 최고이자 최대의 영향력을 자랑하는 나라를 직접 여행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영화 속에서만 보던 휘황찬란한 밤거리와 드넓은 대지위에 낮게 지어진 주택들, 대용량 상품을 파는 거대한 마트들. 머릿속에선 끝없는 생각의 줄기가 이어지고 비행기는 멕시코시티를 출발해 태평양이 드넓게 보이는 서부라인을 따라 1만m 상공을 날았다. 나는 긴장한 채로 앉아 차창 밖을 보며, ABCD를 연습장에 적어보곤, 설렘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로스앤젤레스(LA) 공항의 활주로를 향해 항공기의 앞머리가 숙여지자 나타난 도시의 풍경은 테트리스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정교하게 맞아 떨어진 모습이었다. 이 도시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게 맞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공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10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실리콘밸리로 향했다. 세계 최고의 유니콘 기업들이 모여 있고, 투자자와 창업가들이 창업 생태계를 만들고 있는 그 곳이다. 여행 중 보통 7, 8시간 이상 이동해야 하는 코스는 밤샘 버스를 자주 이용한다. 이동 중에 잘 수 있기 때문에 시간도 벌고 하루 숙박비를 아낄 수 있어서다.
실리콘밸리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 스탠포드가 있고, 스티브 잡스가 창업에 나섰다는 차고지도 있다. 페이스북, 유튜브, 애플, 구글, 인텔, 링크드인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정보통신(IT) 기업의 본사들이 들어서 있다. 아무 것도 없다시피 했던 이 도시가 어떻게 전 세계 IT 업계의 산실이 됐는지 그 이유를 알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매우 들떴다.
세계 최고의 창업 도시답게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받는 연봉은 최소 1억3,000만원이라고 한다.
실리콘밸리의 이름난 글로벌 기업들을 찾아가 관계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새삼 놀란 것은 직원들이 가족이나 친구들과 보내는 소중한 시간까지 빼앗지 않아도 기업은 얼마든지 발전 가능하다는 걸 생생히 볼 수가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팀장은 회사를 옮기려는 팀원에게 ‘업무 성과를 좀 더 높여서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하는 게 어때’ 라고 조언한다. 여느 기업들처럼 팀원이 낸 성과를 자신의 성과인 것처럼 포장하는 나쁜 모습을 보여주기 보다는 팀원이 겪는 어려운 점들을 살펴주고, 보다 좋은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여긴다. 회사는 팀원들이 성과를 내면 낼수록 팀장 역시 함께 성과를 내는 것으로 평가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팀장 입장에서는 팀원이 잘 되면 나도 잘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에 기업이 몰리고 사람이 몰리는 이유는 기업들이 인재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회사보다 좀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이런 경쟁이 자연스럽게 더 많은 인재를 끌어들이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인 것 같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사람 하나하나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회사. 이 사람이 떠나면 조직 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되돌아보며 끊임없이 불편한 점이 없는지 따져보는 회사. 내일 해고당할 수 있지만, 내일 그만 둬 버릴 수도 있는 회사. 다양한 밥과 간식이 무제한 제공되고, 친구와 가족을 초대해 별도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함께 즐길 수 있는 회사. 그에 앞서 눈치를 받거나, 핑계삼을 이유를 찾지 않아도 되는 회사 등이다.
하지만 도시엔 늘 화려함만 있는 게 아니다. 실리콘밸리가 있는 캘리포니아 주 산호세는 중산층의 평균 연 소득이 약 4억원이라고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실리콘밸리 최저 연봉인 1억3,000만원을 받더라도 이곳에서는 저소득층이라는 말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만만치 않은 소득세와 비싸기로 소문난 집값을 생각하면, 연봉이 2억원이라해도 200~300만원이 넘는 월세살이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다.
IT기업의 승승장구는 전 세계의 고액 연봉자들을 불러 모았지만, 주택 증가율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고, 살 집이 부족하다 보니 집값과 임대료 상승을 부추겼다. 실제로 구글의 몇몇 직원들은 먹고 씻는 것은 회사 시설을 이용하고, 잠은 캠핑카를 사서 해결하는 식으로 임대료를 아끼고 있었다. 페이스북은 사원 아파트 공급 계획을 세우고 건설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실리콘밸리 전체의 주거문제를 해결하기엔 한계가 뚜렷해 보였다. 필자가 들렀던 2018년과 2019년은 도심의 임대료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던 때였다.
멀리서 봤을 때는 세상 그 어떤 곳보다도 화려해 보이던 도시를 조금씩 걸어 들어가 하나 둘씩 알아갈수록 생각지 못했던 어두운 현실을 접하게 된다. 실리콘밸리의 양면을 보게 된 것은 누군가가 들려준 ‘22번 호텔’의 존재를 알고부터였다. 22번 호텔은 실리콘밸리의 한복판인 팰로알토부터 2시간 거리에 있는 이스트산호세까지를 24시간 순환하는 버스의 별칭이다.
이 버스는 낮 시간엔 주로 시민들이 이용하지만 밤이 되면 그 빈자리를 노숙인이 채운다. 잠잘 곳이 없는 홈리스들은 처마가 있는 건물이나 공원 등을 떠돌고, 몇몇은 22번 버스 안에서 왕복하는 4, 5시간 동안 눈을 붙이는 것이다.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새벽의 찬 공기를 견디기 위해 운동복 차림으로 밤 11시쯤 22번 호텔에 올랐다. 운전기사는 나를 노숙인으로 봤는지, 내게 돈을 내지 말고 들어가라는 신호를 했다. 출발지에서 종점까지 요금이 편도 2달러, 왕복 4달러라고 들었는데, 기사는 요금을 받지 않았다.
종점인 이스트산호세에 도착해서도 운전기사는 “종점에 도착했으니 내리세요”라고 말했지만 실제 내리는 사람은 서너 명에 불과했고, 그 사람들마저도 잠깐 바람 쐬고 다시 버스에 올라탔다. 순환버스가 30분 정도 멈췄다가 다시 출발할 때도 기사는 나를 포함해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 요금을 따로 받지 않았다.
이들 중엔 일자리가 아예 없는 이들도 있었지만, 멀쩡한 직업을 갖고 있음에도 22번 호텔에 오르는 이도 있었다. 제임스 쿡은 조심스레 묻는 내게 “마트에서 버는 월급으로는 집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도시의 비정함이 느껴졌다. 물론 다른 도시들처럼 산호세 역시 저소득층을 위한 임대주택, 주택비 보조 등의 정책들이 실행되고 있고, 무엇보다 임대료 규제(rent-control) 정책도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공실률은 미국에서 가장 낮은 3%이내를 기록하고 있고, 집 주인이나 정부가 지원하는 주택 역시 좋은 직업이나 높은 신용도를 가진 사람에게 임대를 하려 하기 때문에, 그는 “그런 제도가 우리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며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
세계 최고 소득의 도시에서 밤만 되면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에 아이러니함을 느꼈다. 옆 도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심지어 노숙자 세금을 기업에 물려야 한다는 논쟁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세금 부과가 필요하다는 이들은 연봉 높은 IT기업들이 몰려들고 그 직원들이 살 집을 경쟁적으로 구하느라 임대료가 올라가고 그 결과 집값 감당이 어려운 시민들을 노숙인으로 만들고 있다는 논리를 펴는 것이다.
종점에 도착 한 뒤, 어디론가 가려는 운전기사를 붙잡고 짧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노숙인들이 버스를 타기 시작 한 것은 십 수 년 전의 일”이라는 그는 “갈수록 노숙인 수가 늘어나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노숙인 쉼터 같은 공간이 부족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산타클라라 카운티의 노숙인 숫자는 2017년 기준 7,394명으로 거대도시 뉴욕과 LA 등에 이어 7번째로 많다.
필자는 버스의 앞 칸과 중간, 뒤 칸으로 자리를 바꿔가며 여러 시야를 갖기 위해 노력했다. 버스 안에는 엔진 소리와 '치이이익' 문 열고 닫는 소리, 그리고 코 고는 소리들이 뒤섞여 요상한 협주를 듣는 것 같았다.
그 중에는 부부로 보이는 노숙인도 있었는데, 이들이 쓰는 언어가 중국어인지, 다른 언어인지 구별할 수 조차 없었지만, 행색은 이방인처럼 여겨졌다. 잡동사니를 담아둔 여행 가방과 비닐봉지를 소중히 잡고 있었지만, 잠이 깊어지면 그마저 손에서 떨어져 나가 버스 복도에 나뒹굴곤 했다.
이들은 어쩌다가 집 없이 떠돌게 되었을까.
버스기사는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22번 버스의 운행 시간을 단축하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고 귀띔했다. 버스회사인 VTA(Valley Transportation Authority)의 적자가 연 2,000만 달러이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새벽 1~4시 운행을 중단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 계획은 의회의 반대로 아직 실현되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2019년 이 지역은 일시적 노숙자들을 포함해 연간 1만8,000명의 노숙자가 존재했다.
전 세계 엔지니어들의 꿈의 도시 실리콘밸리는 천문학적 가치를하며 부와 명성을 쌓았지만, 가보지 않았더라면 알지 못했을 도시의 양극화를 눈으로 확인시켜줬다.
현재 실리콘밸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재택근무를 하는 기업들이 많아졌고, 도심의 비싼 임대료를 피해 외곽으로 옮기는 이들도 늘고 있다. 때문에 시내의 주택 임대료는 5~20% 가량 내렸고, 이를 틈타 버스 회사들은 단축 운행을 현실화시켰다.
이제 노숙인들은 어디에서 잠을 청해야 할까. 주택 정책과 일자리 정책의 사각지대로 밀려난 이들을, 의료 정책이라고 살뜰히 챙겨줬을까 싶다. 캘리포니아는 1일 현재 50만 명 이상의 코로나19 감염자가 나왔고, 사망자는 9,000여 명에 이른다. 목숨을 잃은 이들은 주로 누구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