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물

입력
2020.08.0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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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위치에너지를 지닌 세상의 모든 물은 시차를 두고 아래쪽을 채우기 마련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의 시대에도, 소양강댐을 건설한 박정희 정권 때도 그랬다. 만고불변의 이 법칙은 1980년대 미국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의 핵심이 된 ‘낙수효과’ 이론을 끌어낸 배경이기도 했다. 강자를 더 강하게 만들어야 약자에게도 물이 위에서 아래로 향하듯이 힘과 재화가 돌아갈 수 있다는 논리. 이러한 물리학의 사회화는 효율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고성장시대의 무한동력으로 작용하며 지금까지 힘을 잃지 않고 있다.

물은 아래로 흐르고, 그래서 강한 자의 지갑이 채워지면 약자의 그릇에 돌아가는 몫도 늘어난다는 오랜 법칙과 금언은 그러나 요즘 세상에서 흔히 드러나는 현상과 일치하지 않아 보인다.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물은 거꾸로 아래부터 차올라 위로 향하고, 온갖 재난은 그래서인지 빈자의 마을을 가장 먼저 두드린다.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의 동네가 구정물로 잠기는 동안, 바싹 마른 윗동네 박 사장의 아내는 푸른 하늘을 만끽했듯이 아랫동네와 윗동네의 풍경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지난달 말부터 전국을 휩쓸고 있는 집중호우를 봐도 그렇다. 산사태로 몰려든 토사가 덮친 안산시 산등성이 아래 주택, 갑자기 불어난 하천물에 터전이 떠내려간 충주시 주민들, 집안으로 쏟아 들어온 갑천의 탁류 속으로 세간을 흘려보낸 코스모스 아파트 사람들. 하나같이 그들은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물에 당했다.

올해 들어 가장 큰 재난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세도 다르지 않다. 집단감염의 현장을 살펴보면 가난하고 쇠약한, 그래서 사회의 아래쪽에 머물고 있는 이들의 일상이 가장 먼저 피해를 입었다. 새벽 편의점에서 늦은 저녁을 때우고 통근버스에서 쪽잠을 자야 했던 물류센터 노동자, 밀집된 공간에서 목청을 높이느라 마스크를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일하던 콜센터 직원, 늦으면 평점이 깎여 손 씻을 시간도 아껴야 했던 배달 노동자, 고위험군 무리에서 종일 일하며 제대로 보호장비를 받지 못한 돌봄종사자. 이들의 생계는 모두 ‘감염병 노출 위험이 높은 직업군’(사회공공연구원 자료) 리스트 상위 업종에 달려 있다. 홍수와 감염병 같은 재난은 물론, 빈곤의 가속화를 부르는 각종 사회적 재난의 물결도 아래부터 치고 올라온다. 물은 위에서 흘러내려와 아래를 뒤늦게 적신다는 말은 불변의 참은 아닌 셈이다.

최근 정부는 복지정책 대상자 선정의 잣대가 되는 내년 기준 중위소득을 기대 이하 수준으로 인상하는가 하면, 대선공약으로 내세웠던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사실상 포기하고 기준의 개선 정도에 그치는 계획(제2차 기초생활보장 종합계획)을 내놓으면서 비판을 받고 있다. 병원비를 국가가 지원하지 않으면 당장 무너져 내릴 취약계층을 돌보지 않는 정부의 이런 행보에 복지전문가들은 “사각지대를 방치하는 무책임한 처사”라는 입장을 앞다퉈 내놓는다. 강자보다 약자를, 부자보다 빈자를 먼저 살필 것이라는 믿음 위에 세워진 지금의 정부는 초심을 지켜 아래부터 적셔오는 재난의 물길을 돌릴 수 있을까. 신종 코로나의 위기가 변명이 될 때 가장 먼저 쓰러지는 이들이 누구인지 기억하기를 바란다.



양홍주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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